[고향 마산자랑 과 나]/내고향 마산!

독립운동사와 독립투사

현정 (炫貞) 2007. 4. 12. 14:12

마산지역에서의 3 · 1 운동은 기독교계의 창신학교 설립관계자 李承奎·李相昭·孫德宇와 교사 任學讚·朴順天 등을 중심으로한 종교세력과 李濚宰·明道奭·金容煥·卞相泰등 마산의 민족주의자들의 두 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 두세력은 3 · 1만세시위에 즈음하여 서울의 민족주의지도자들과 비밀리 접촉하는 등 거사에 대비한 준비를 엄밀히 진행하였다.

종교계의 활동
1919년 2월 23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李甲成이 비밀리에 마산에 내려왔다. 이갑성은 知己인 任學讚(창신학교 교사)의 소개로 이상소 長老와 회동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대한 의견과 서울의 3 · 1만세 계획을 은밀히 알리고 함께 궐기할 것을 종용하였다. 귀경한 이갑성은 계획의 은밀한 추진을 위해 같은 달 26일 김해 출신의 세브란스 醫專학생 裴東奭을 다시 마산으로 밀파하여 독립청원서의 서명운동을 시도했으나 연락 미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울의 이갑성은 2월 28일 민족대표의 한사람인 金昌俊으로부터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다시 李容相(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 하여금 대구·마산의 동지들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이에 3월 2일 대구를 거쳐 마산에 온 이용상은 임학찬·이상소에게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임학찬·이상소 등은 이 선언문을 일반시민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이형재를 통하여 다시 김용환에게 건네 주었다. 김용환은 3월 3일 오전 11시쯤 두척산(무학산)에서 있었던 高宗황제 國葬행사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과 항일궐기를 고취하는 일장연설과 함께 지니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살포하였다. 김용환의 연설을 듣고 잠시 흥분 속에 들떠있는 일반군중들에게 창신·의신학교 학생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사전에 준비해 온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하나하나 나누어주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대오를 갖추어 마산민의소(현 시민극장 자리)쪽을 향해 만세행진을 하였다. 학생들은 구마산을 한 바퀴 돈 다음 학교로 되 돌아와 다시 독립선언서(韓泰益 낭독)를 읽었다. 숙연한 분위기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는 동안 학생들은 비장한 얼굴로 분노와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렸다. 이와 함께 학부모들과 일부시민 등 약 3~4천명도 이 날 하오 4시 경 구마산을 누비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출동한 일본헌병들과 충돌하여 시민 50 여명이 체포되어 갔다. 이 거사를 마산의 4 · 3 만세사건이라 일컫는다.

민족주의자들의 활동
한편 기독교계 저항세력과는 별도로 2월 25일 당시의 비밀결사단체인 大同靑年團으로부터 즉시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은 金觀宰와 卞相泰는 그 날로 서울에 올라갔다. 서울의 3.1 만세사건의 전말과 상보를 취합하여 3월 5일 마산으로 되돌아 온 김관재는 이형재·김용환에게 이를 알리고 갖고 온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 뭉치를 전달하였다. 김관재로부터 서울에서 있었던 우리 민족의 의연한 독립선언에 이은 만세시위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이형재·김용환은 재차 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두 사람은 향토의 우국동지 明道奭·崔鏞奎 ·李廷讚 등을 은밀히 만나 밀의 한 끝에 3월 10일 추산정에서 범시민적인 궐기를 단행할 것을 합의하고 준비작업과 연락을 극비리에 진행하였다. 이들 거사 주동자들은 드디어 3월 10일 10시경 추산정 예비장소에서 회동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리고 현장에서 일본헌병에 의해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었다. 그러나 남달리 의협심이 강한 김용환을 제외한 주동자 전원이 훈방되었다.
훈방으로 풀려 나온 동지들은 더욱 기밀을 유지하면서 세력을 규합하던 중 평소부터 신망이 두터운 장신교의 교사 任學讚과 의신학교 교사 朴順天·金弼愛 등 원군을 얻어 이달 20일 구마산의 정기 장날에 거사키로 합의를 보았다. 이때 이미 박순천은 서울로부터 밀파된 裵東奭으로부터 마산여고 부근 한적한 솔밭에서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전해 받았으며 조국광복을 위해 젊음과 양심을 불태워 달라는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박순천·김필애 등 두 교사는 당시 상급반으로 학우들간에 인기가 있고 리더십이 강한 崔鳳仙 학생 집에서 누차 모여 거사계획을 짰다. 한편 창신학교 쪽에도 연락하여 金純 ·韓又 등 교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오스트레일리아人 나대벽교장과 그의 비서겸 서기인 李聖甲의 호의로 학교등사판을 이용하여 수천 매의 독립선언문을 몇 시간에 걸쳐 등사하였다. 3월 21일 이른 아침부터 구마산 장터에는 인근 창원면과 내서면 ·진동면·진전면·진북면 등 농촌지역에서 몰려든 장꾼으로 붐볐다. 태극기와 선언서는 女褓負商을 가장한 金益烈로 하여금 金祺鎬가 경영하는 중성동 소재 구름이발관까지 운반토록 하여 무사히 시장안 군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오 경 마산발 삼랑진행 열차가 발차 기적을 울리자 이를 거사의 신호로 수천 애국 마산시민들은 일제히 궐기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목청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민과 학생들이 함께 참여한 만세 행렬의 물결은 시내를 누볐다. 시위행렬에 크게 당황한 마산주재 일본군 헌병과 경찰들은 비무장의 시위군중에 억압의 총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분노의 함성과 만세의 물결은 일경의 총칼 앞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에 침략자들은 진해의 일본군 해군경비부에 연락 정박 중이던 전함 朝霧號를 급거 마산항에 항진케 하는 등 전투태세를 갖추기까지 하였다. 이 날 만세의 물결은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다.
3월 3일 창신학교생 시위와 3월 21일 만세시위 등 두 차례의 거사에서 주동자 다수와 많은 시민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박순천을 비롯한 학교관계 주동자들은 설립자인 李承奎 장로와 나대벽(창신교) 교장의 신원보증과 간청으로 겨우 풀려났지만 일반 주동자들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다.
3월 21일 거사가 있은 지 4일 만인 3월 25일 장날을 기해 마산의 만세시위는 다시 타올랐다. 이날 정오를 지나 2시 쯤 석전동에서 출발한 만세군중은 앞서 두 차례의 의거로 부당하게 투옥된 우리의 애국지사와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북마산 도로를 따라 북마산 파출소를 거쳐 오동동 형무소(현재의 한국은행지점) 쪽으로 진출하였다. 시위가 진행될수록 군중의 수는 늘어나 3천여 명(당시 마산인구 1만5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일부 극렬 시위자들은 당장이라도 형무소 문을 부수고 쳐들어가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시위군중의 확산에 더욱 다급해진 일경당국은 가포동의 일육군 중포병대대에 급히 연락하여 병력 40여 명이 긴급 출동하였다. 출동한 일본군은 우리 애국시민들에게 총검을 휘두르며 만행을 자행해 이 날도 주동자 20여 명을 강제로 체포해 갔다. 일본 관헌의 감시는 3월 들어 몇 차례의 만세시위가 터지자 더욱 가혹해 졌다. 소위 저들의 요시찰대상자에 대한 미행과 감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애국시민 학생들의 항일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3월 31일 잠잠하던 고요의 거리는 다시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 성난 만세군중들로 메워졌다. 3천여명 가까운 군중들이 당시 마산감옥(교도소)을 첩첩이 둘러싸고 애국지사들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였다. 군중들의 독립만세소리가 감옥의 담벼락을 넘어 감방 안으로 울려 퍼지자 옥중의 지사들도 일제히 감방에서 일어나 창 밖을 향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감옥 안팎에서 터져나오는 만세의 함성은 대기를 타고 하늘높이 메아리쳐 갔다. 급거 동원된 일본헌병들은 군중의 해산과 진압을 위해 총칼을 휘두르며 발악하여 또 다시 많은 애국시민들을 투옥시켰다. 특히 이 날의 시위운동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마산형무소 한국인 간수 朴光淵이 제복을 벗어 던지고 만세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러 많은 시민들을 환호케 하였다. 박광연은 이 날 시민들의 벅찬 만세함성에 감동되어 시위에 합류하였는데, 이 일로 그는 파직되는 동시에 그가 봉직했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3월의 만세항쟁 속에 1백명 가까운 애국지사 시민들이 체포 구금되었으나 분노의 불길은 잠시 멈추었을 뿐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4월에 이르러 이 불길은 다시 타올랐다. 소위 공립학교로 마산에서 제일 먼저 개교된 馬山公立普通學校(성호초등학교의 전신)학생들이 4월 22 · 23 · 24일의 연 3일간 교내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한 어린 한국인 학생들의 의기를 과시하였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학생들은 괘념치 않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끝내 사태수습에 실패한 학교당국은 경남도학무국에 품신하여 4월 24일자로 임시휴교조치를 요청하는 등 졸렬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마산의 3월 만세시위운동은 3월 3일 창신학교 학생들이 불붙인 이후 전후 7-8회에 걸친 거사에서 우리민족의 정당한 요구를 당당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세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마산의 선각적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수 없이 체포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중에서도 3 · 3 만세시위와 3 · 10 추산정 거사에서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던 항일지사 김용환은 1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 감옥에서 복역 중 심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옥사하였다. 또한 창신학교 부교장이던 이상소 장로는 몇 차례의 만세항쟁의 배후조종 및 주모자로 피검되어 馬山檢査局을 거쳐 다시 大邱復審法院(항소심)과 서울고등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西對門刑務所에서 복역하였다. 그리고 서울 사람으로 3월 2일 마산에 밀파되어 창신학교 이상소에게 최초로 독립선언서를 전해준 이용상은 이 달 25일 3 · 3 마산만세사건 연루자로서 서울서 체포되어 이상소와 함께 재판을 받았다. 또한 3월 만세사건의 1,2차 주동자 박순천은 요행히 사건 당시 이승규 등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일본으로 밀항하였으나 이듬해인 1920년 봄에 다시 체포되어 마산형무소에서 1년을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