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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삼진의거 사적비

현정 (炫貞) 2007. 4. 12. 14:14

건립일자 : 1985. 12. 15
소 재 지 :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 198
(8의사묘 입구)
건립기관 : 마산시
관리기관 : 8의사 묘역사업추진위원회
시설규모 : 높이 2.2m

1919년 3월 28일 경남 마산시 삼진지방(진동·진북·진전)에서 일어났던 1차마산삼진의거(고현시장의거)와 1919년 4월 3일 2차마산삼진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마산시(당시 행정구역상 명칭 : 창원군)가 주관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건립일자 : 1963. 11. 5
소 재 지 : 마산시 진동면 사동리 237번지
( 고현마을 입구)
건립기관 : 팔의사 창의사업기성회
중건 : 1990. 8. 15

삼진의거 8의사를 기리는 창의탑으로 진동을 지나 마진국도를 따라 진주 쪽으로 얼마쯤가면 진동면 사동리 237번지 국도변에 하늘을 향해 우뚝 선 8각형의 탑이 하나 서있다. 3 · 1운동 당시 2차마산삼진의거에 숨진 8의사를 기리는 창의탑이다. 이 창의탑은 기미년 3 · 1운동 당시 이 고장 삼진의거를 주동하고 의거 군중의 선봉에 서서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장렬히 숨져 간 여덟 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63년 10월 삼진 면민들의 손으로 세워졌다.

여기 창의탑의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19년 4월 4일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양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의 8의사는 수천 군중의앞장에 서서 우렁찬 조국 독립 만세를 외치다 왜병의 총탄에 무참히 쓰러졌다.]
이들 8의사는 순국 당시 30세 전의 피끓는 청년들이었다. 정부는 이들 8의사의 유훈을 기려 1938년 건국 공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소 재 지 :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 198번지 일원

4월 3일(음력 3월 3일)에 일어난 2차마산삼진의거(진전, 진동, 진북)는 당시의 수원, 신천, 수안과 함께 독립 대항쟁으로 불렀다. 변상태는 다시 음력 3월 3일 거사키 위하여 고현의거 때 피하여 온 권태홍, 권녕대, 변상헌과 지방의 변갑섭, 김수동, 김영종, 구수서 등에게 연락하였다. 많은 시민들 앞에서 변상태는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을 달성하고자 외쳤고, 변갑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장렬한 최후를 맞은 여덟 분이 있으니 이를 [8의사]라 부른다. 그 분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김수동, 김영한, 변갑섭, 변상복, 고양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이며, 현재 진전면 양촌리 8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소 재 지 :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 198번지 일원

1919년 국권 회복 중앙본부로부터 서부 경남일원의 독립만세에 의거의 지도책임을 맡은 변상태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8일 진동면 고현장날을 기하여 봉기하였다. 이날 장터의 중앙에 단을 만들고 권영대는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였으며 장꾼들은 너나할것없이 일체가 되어 일어 나서며 독립만세의 함성은 앞바다를 들끓게 하였다. 시위군중은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진동에 나아가 민족정기를 크게 떨쳤으며 수많은 우리의 동포가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말할 수 없는 치욕의 고문 끝에 아홉 분이 옥고를 치루었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민족의 의기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변상태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1주일후인 4월 3일에

크게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은 음력으로 3월 삼짇날이다.
이날 삼진면 양촌 냇가에는 일천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진동으로 향하여 연도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세하여 8천이 넘는 대중을 이루었다. 시위 행렬이 진북교에 이르자 다리를 사이하여 미리 포진하고 있던 일본 헌병과 그 보조원 20여명이 진로를 막았으나 서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군중을 휘동하던 김수동은 달려드는 헌병을 뿌리쳐 다리 아래로 던졌다. 이어 일헌병이 발포하니 김수동은 흉탄에 숨졌고 그 옆에 있던 변갑섭은 태극기를 이어받아 전진하다가 일헌병의 칼에 두어깨를 잘리어 쓰러졌다. 이날 앞장섰던 여덟 분이 적의 총칼에 숨지고 스물두분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장은 피의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일곱분이 참담한 옥고를 치루었다. 이 삼진의 독립만세의거는 수원, 수안, 선천의 의거와 더불어 4대 의거로 일컬어진다.

소 재 지 :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 198번지 일원

조국을 빼앗긴 분노는 구천을 매웠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열의와 투지는 사해에 넘쳤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비분 강계한 선생은 17세의 나이로 정명교, 황병기 등과 뜻을 모아 엽총등을 무기로 창의 준비를 했으나 일제 헌병에게 탐지됨에 총기를 불사르고 뜻을 펴지 못한 체 뒷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8 · 15 광복의 그날까지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자리의 따스할 날이 없었으니 그 일편단심은 봄의 선구자 진달래꽃 보다 더 붉게 타올랐음이리라 선생은 초계변씨 28대손으로 1889년 10월 11일 경남 의창군 진전면 양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字는 景宰요 號는 석당이다.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강하여 국정의 잘못을 통탄하더니 부산 상업학교 3학년이던 1910년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잃자 최기택, 성학영 등 여섯 동지와 조국 광복을 위해 함께 죽기

각오하고 결연히 학교를 중퇴 대붕회(大鵬會)를 조직한 뒤 동지 규합에 전념하였다. 1917년 윤상태, 남형우, 안희재, 박중화 등 50여 동지와 대동청년단에 가입 모험부장이 됨으로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활동 책임을 졌다. 대동청년단은 당시 국내의 기반을 가진 유일한 독립 운동결사였다. 1919년 2월 하순 대동청년단 동지로부터 전보를 받고 상경하여 만세의거에 참가한 뒤 서부경남 일원의 중책을 띠고 귀가하였다. 그리하여 이강우, 김재회 등과 진주의거를 상의하였으며 신종목과 거창 의거를 협의하였다. 3월 중순에는 함안군 군북면 사촌 조용태 집에 머물면서 군북의거 준비를 지휘하였다. 3월 하순 귀가하여 동지 권영대, 권태용, 親弟 상헌등과 종중선실 일신제에서 고향의 거사 준비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3월 8일 선생이 주모한 고현의거는 앞바다마저 들끓게 하였고 4월 3일 선생이 지휘한 삼진의거는 국내 4대 의거의 하나로 손꼽혔다. 선생은 그날 진양군 남문산에서 동지 서상일, 김관재, 신종목과 만나 앞으로의 제반 계획을 상의하고 곧이어 합천군 초계로 거유 이직현을 방문하여 국사를 담론하면서 그의 근친인 이원화에게 초계의거를 위임하였다. 1920년 경성 복심법원에서 제영 위란죄로 심리된 대구 28인 사건의 한사람이었으나 피신하여 체포를 면하였다. 28인 사건은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며 이에 관련된 사람은 주로 대동청년단원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쳐 활약하는 열혈 우국지사였으나 곽인협, 김상집 등과 아사동맹회를 조직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22년 1년간의 일본 피신생활에서 돌아와 전남 송정리의 호남물산 사장인 從弟 상구의 거실에서 의열단의 투사 이종암을 만나 3천원을 수교하여 상해로 가게 하였다. 다음해 3월 18일 이종암은 상해 황포탄에서 침략의 원흉 일제 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一)을 저격하였다. 22년 7월 선생은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어 미결 6월 서대문 감옥 6월, 함흥감옥 2년의 옥고를 겪었다. 손톱, 발톱과 살을 찢는 고문에도 결코 굽히지 않아 투철한 독립지사로서 뭇사람의 숭앙을 받았다. 출옥 후 옛동지들과 망국의 한 을 되씹다가 1944년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주현, 구여순, 장두천 등 11명이 고려구국동맹회를 조직하여 지하운동에 심혈을 받쳐오던중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63년 11월 2일 별세하시니 양촌리 뒷산 선영하 양좌원에 부인 안보가와 쌍군으로 잠드시다. 선생의 행적을 어찌 작은 돌에 모두 담을 수 있으랴 이제 조국의 높푸른 하늘에 저토록 태양이 찬란하듯 선생의 그 거룩한 뜻은 겨레와 함께 영원하리라.

소 재 지 : 마산시 완월동 27-3번지 마산고등학교 교정



소 재 지 :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 198



소 재 지 :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 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