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삼진의거에 대한 논의는 전국적인 삼일운동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하순경에 변상태는 서울(당시 명칭은 경성부)로 올라오라는 긴급 전보를 받게 되었다. 『경남독립운동소사』의 저자인 변지섭은 이 전보를 친 사람이 대동청년단 동지였다고 적고 있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삼협인쇄사, 1966) 그렇지만 변상태가 대동청년단으로부터 받았다는 연락 내용에 대해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발송자가 대동청년단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변상태는 김관제(金觀濟) 및 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서울로 갔는데, 이 중 김관제는 변상태와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산삼진의거 이후에 진행된 재판에서 변상태와 조선국권회복단의 관계가 집요하게 추적되고 있는 것으로 보자면, 전보를 친 조직은 조선국권회복단이었을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대동청년단 혹은 조선국권회복단이 변상태에게 서울로 올라오라고 연락한 이유는 3월 1일로 예정되어 있던 고종 인산일의 시위와 관련되어 있었다. 고종의 국장에 때맞추어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기 위하여 전국 각지로부터 애국 인사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는데, 변상태도 그 흐름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변상태 및 그와 동행한 두 사람은 3월 1일에 벌어진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후에 조선국권회복단 혹은 대동청년단으로부터 임무를 각각 부여받았다. 그에 따르자면, 변상태는 서부 경남 일원에서, 김관제는 동부 경남 일원에서 의거를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 김관제는 김해에서 경영하던 약방을 대구로 이전한 바 있었으므로, 동부 경남 일원에 대한 연고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변상태와 함께 서울로 같이 간 이시영은 연락 업무를 부여받아 만주로 간 것으로 보아 당시 변상태가 속한 조직의 활동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고 볼 수 있다.
3월 5일에 고향으로 돌아온 변상태는 독립만세시위를 확산하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귀향 직후 그는 서부 경남 일원에서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중심이 되어 소집된 모임에는 이수룡, 권태용, 권영조, 권영대, 변상섭, 변상헌 등 삼진면이 속해있는 창원에 살고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희석, 조태식, 이경형(혹은 이재형) 등 함안 사람들과 황태익처럼 고성에 연고를 지닌 사람도 참석하였다. 이 모임에서 변상태는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 전말에 대해 설명하고, 서부 경남 일원에서의 만세 시위를 논의하였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966)
이처럼 변상태는 서부 경남 일원에서의 만세운동을 독려하는 동시에 자기 고향인 삼진에서의 만세 의거 준비에도 구체적으로 착수하였다. 이 준비 작업에는 변상태만이 아니라, 권영조, 권영대, 변상섭, 권태용, 변상헌, 백승학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의거일을 3월 28일(1차 마산삼진의거)로 잡고, 거사 장소는 고현 시장으로 결정하였다. 당시에 전국적인 만세 시위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변상태 등이 중심이 되어 준비되고 있던 의거는 비폭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무기를 준비하지 않고 평화적인 시위 준비를 하였다. 의거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백승학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를 제작하고, 판각 기술을 가지고 있던 권태선이 중심이 되어 격문으로 사용할 목판 제작에 나섰다. 격문의 내용은 “曰我同胞 有進無退”, 즉 “가로되 우리 동포는 나아감이 있으되 물러섬은 없다.”였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통하여 일제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시위 준비자들은 각 면을 돌아다니면서 고현 시장에서의 만세 시위를 알리고 적극적으로 참여를 권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