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산자랑 과 나]/내고향 마산!

마산 삼진의거 사건에 대한 당시의 신문보도

현정 (炫貞) 2007. 4. 12. 14:16

2차마산삼진의거에 대하여 당시의 신문은 어떻게 보도하였는가. 당시 국내의 신문은 [매일신보] 한가지뿐이었기 때문에 마산삼진의거에 관한 기록도 매우 적을 수 밖에 없다. 함안 사건에 관한 [매일신보]의 기사는 1919년 3월 22일자인데, 함안 사건이 19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치면, 3일 차이다. 그러나 3월 28일에 있었던 1차마산삼진의거(고현시장의거)에 대해서는 관련 기사를 찾지 못하였다. 아마 보도되지 않은 듯한데, 이것은 28일의 1차마산삼진의거(고현시장의거)가 규모면에서 피해 등에서 주목을 끌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삼진 사건이 처음 신문에 보도된 때는 1919년 4월 7일자 [매일신보]이다. 당시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매일신보는...
o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바꾸었으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형태로 운영되었다.
o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까지는 매일신보가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다.
o 매일신보에서는 3·1만세운동을 소요사건(騷擾事件)으로 표시하였으며 1919년 3월 7일자부터 처음 게재되었고 1919년 5월 5일자로 기사가 끝나고 있다.
o 매일신보는 일제가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날부터 광복되던 날까지 중단된 일없이 발간된 단 하나의 한국어 신문이며 현재의 서울신문 -> 대한매일신보의 제명으로 계속 발간되고 있다.



사상자삼십여

사월 삼일에 진전면에서 군중 수백명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글피부터 진북과 합세되어 수천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면서 진동을 향하여 나가 동지(同地) 헌병주재소에서 출동하여 진무에 노력하나 종시 듣지 아니하는고로, 부득이 발포하여 일곱명은 즉사하고 중상자와 경상자가 이십여명인데, 주모자 약간을 검거하였다더라.

이십구인 검사국에

객일 이십삼일 창원면 구읍에서 군중 약 천여명이 구한국 국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다가 동지 헌병 주재소의 엄중한 진압으로 인하여 해산된 바, 검거된 자가 이십오인이요. 부상자가 삼사인이었고 사월 이일 장날을 이용하여 군중 수백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가 사인이 검거되었는데 합 이십구인은 마산 검사국으로 압송시켰다.

주재소에 돌질

창원군 진동면에서는 삼일 군중이 모여 소요를 개시하고 헌병 주재소 우편소에 대하여 돌질을 던지고 폭행을 하였으므로 부득이 발포한 후 해산케 하였다더라. 이 소요에서 군중 편에 약간의 사상자를 내었다더라.


위의 글은 두 개의 사건에 관한 기사가 뒤섞여 있다. 곧 2차마산삼진의거을 간단히 기술하고 다시 창원읍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2차마산삼진의거에서 일본 헌병이 왜 발포를 하였는가에 대한 보완적 성격의 기사를 실었다. 제1신에서 헌병의 진무 노력을 외면하였다는 것으로는 발포의 이유가 약하였다고 판단한 기자가 다시 그 이유를 소요 군중의 공공기관에 대한 돌질과 폭행이라고 덧붙인 셈이다. 흥미 있게도 앞의 기사에서는 사상자가 거의 정확하게 기술된 데 비해 뒤의 기사에서는 군중 쪽에 약간의 사상자를 내었다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곧 발포의 원인으로서 군중의 폭력을 강조하면서 희생자를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기사를 발송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창원 지역에서 있었던 만세 사건에 대한 [매일신보]의 기사는 4월 29일 사파정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한 차례 더 보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사실 독립만세 시위 사건은 대략 4월 말에 이르면 수그러들었으므로 더 이상의 기사도 찾기 어렵다. 따라서 마산삼진의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신문보도는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