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의 박물학자 (玆山魚譜의 정약전)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양
생물학 서적 자산어보 (玆山魚譜) 를 지은 손암 정약전
어릴 적 부터 총명했던 그는 실학자 성호이익의
저서를 읽으며 새로운 서양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동생 정약용은 그의 명철함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나의 형님은 재질로 말하자면 나 보다 훨씬 낫다
머리가 좋아서 수학책을 보면 금방 이해하곤 했다
1784년 정약전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을 천주교를 받아 들인다
어지러운 정세에 회의를 품은 그는 서학과 천주교에
조예가 깊은 처남 이벽 등과 함께 선교 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1801년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자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동생 정약종은 순교했고
정약용도 각각 흑산도와 강진에 유배되었다
일어나 밝은 별을 보니
다가 올 이별 더욱 슬퍼
망연히 마주 보며 할 말을 잊고
솟구치는 슬픔에 목이 메인다
멀고 먼 흑산도는 바다와 하늘이 잇닿는 곳
형님이 어찌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
정약용은 서쪽으로 가는 형을 보며
애통한 심정을 이렇게 ?었다
외딴 섬에서의 귀양살이였지만
정약전은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글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 대신 글을 써주고
“복성재”라는 서재를 지어 섬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동생 정약용과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는데
정약용은 冊을 완성할 때 마다 흑산도에 보내 형의 감수를 받았다
정약전이 유배 생활에서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물고기를 비롯해
갯지렁이 갈매기, 고래, 미역, 에 이르기 까지 226종의 해양생물의
생태와 특징을 자세하게 기록한 <자산어보>를 펴낸 일이다
때 마침 목화실로 그물을 짜 내면서 고기잡이 기술이 발달해
정약전의 연구는 어부들에게 요긴하게 쓰였다
<자산어보>는 당시 흑산도에 통용되던 생물의
이름을 흑산도 방언 그대로 옮겨놓아 동식물의
옛 이름과 어원 그 변천 과정까지 추측케 한다
정약전은 冊 序文에 冊 제목을 <자산어보>라 지은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흑산이란 이름이 어둡고 처량한 느낌을 주므로
집안 사람들이 편지를 쓸때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으로 쓰곤했다
玆는 黑과 같은 뜻이다
1814년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자신을 ?아올 거라는
소문을 듣고 우이도로 마중 나갔으나 끝내 동생을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1816년 여름, 귀양살이 16년 만에
정약전은 5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朝鮮의 박물학자 정약전 1758~1816)
착한사슴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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