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과 술과 달의 도시. 십년 전의 경주는 내게 그렇게 기억됩니다. 바라보기 좋은 초승달이 있었고 무욕의 취기가 있었고 비현실적이어서 편안했던 무덤들이 있던 그 도시에서 이십대 초반의 내 마음은 어떤 무늬들을 깁고 있었을까요. 십년 전 내 몸이 캄캄하여 차마 깨울 수 없었던 신라의 마음은 무엇이었을지. 붉은 꽃을 꺾다
참나무로 만든 기이한 14면체의 주사위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흔히 보는 8면 주사위도 아니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반질거리는 표면엔 붉거나 까만 점이 박힌 대신 무어라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삼잔일거(三盞一去). 술 석 잔을 한 번에 마시라? 아하, 그제서야 나는 무릎을 칩니다. 주흥을 돋우기 위한 놀이용 주령구(酒令具)인 게로군. 주사위의 각 면에는 한 잔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술 마시기,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를 청하기, 이런 익살스러운 문구들이 적혀 있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 추기를 즐긴 인간의 마을이 떠오르고 나는 슬며시 고이는 웃음을 베어 물고는 두 편의 매혹적인 사랑 노래를 떠올립니다.
“자줏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동해 용왕도 탐을 내었다는 아름다운 용모의 수로부인이 남편 순정공의 강릉 태수 부임 길에 동행하다가 바닷가 절벽에 피어있는 어여쁜 철쭉꽃을 보았다지요. 그 어여쁜 꽃을 너무나 갖고 싶어했던 수로에게 소를 몰고가던 한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치면서 불렀다는 「헌화가」입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즐거운 상상에 빠집니다. 험한 절벽 끝에 핀 꽃이라 아무도 꺾어다 바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한 허름한 노인이 아름다운 수로 부인과 눈을 맞추며 말합니다.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라고. 노래가 읊어진 맥락이야 벼랑을 오르기 전 ‘나를 허락하시면 저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일 수도 있고 무작정 꽃을 꺾어들고 내려와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받아주십시오’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아름다운 것에의 탐닉은 열렬하고도 순정한 것이어서 백발 성성한 노인네라 하여 그 감흥이 감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실은 ‘나의 백발과 나의 남루함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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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백성이나 신분이 높은 계급이나 젊으나 늙으나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흥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사모하는 마음을 향해 있을 때 모든 마음은 열렬하고 귀한 것이라는 존재 증명의 싱그러움. 꽃을 꺾기 위해 벼랑을 오르는 노인의 등 뒤로 일렁이는 근육질의 동해 바다가 있었을 것이고 어린아이 웃음처럼 깨끗한 욕망을 지닌 푸른 하늘이 있었을 겁니다. 밀실이 아닌 드넓은 바다와 하늘 아래서, 은밀하고 자폐적인 속삭임이 아니라 일행과 남편까지 있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노래된 이 헌화의 노래는 솔직하고 분방하여 유쾌합니다.
나는 이제 한 사내를 떠올립니다.
“서라벌 달 밝은 밤에/ 밤 깊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건만/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노래의 외연으로만 보자면 아내의 불륜을 목도한 비극적인 사내의 노래가 되겠지만 처용의 존재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맥락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나는 이 노래에서 낙천적인 분방함을 지닌 신라의 선남선녀를 만납니다.
달 밝은 밤 주흥을 만끽하다 집에 돌아온 사내. 사내가 밖에서 노니는 사이 여인은 노심초사 발 동동 구르며 남편을 기다리느라 애간장 태우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무르익은 달밤의 관능을 즐기지요. 처용은 돌아와 아내의 유희의 시간을 목도하지만 드잡이질을 하지도,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밤 늦도록 노닐다 돌아온 자신에게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있었듯이 아내의 즐거움을 존중해 주려는 듯도 보입니다. 나는 처용과 그의 아내에게서 문란하다기보다는 자유로운 소통의 방식을 체득한, 서로의 욕망에 진솔하게 다가서 있으므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 오래된 연인의 모습을 만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마음이니, 그 마음의 역동성을 일방적으로 막아두기만 해서야 소통이 가능해질 리가 없지요. 상대방의 욕망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결국은 ‘서로’에게로 마음이 기울어 오도록 만드는 마법의 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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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는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벽사진경(酸邪進慶: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치고 좋은 일을 맞이함-편집자 주)의 노래로 읽을 때에도 사뭇 매혹적입니다.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역신이 사랑했답니다. 역신이 아내를 흠모하여 아내를 범했다는 것은 죽음(병)이 아내의 삶(몸)에 깃들었다는 것인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하는 처용의 태도는 처연하고 비극적이지만 평온합니다. 삶으로부터 죽음을 억지로 분리시키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순간이니 젊음도 그러하고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이 비극적이고 냉정한 삶의 순리를 받아 안고 그는 다만 달빛에 온몸을 적시며 춤을 춥니다. 처용의 춤은 생로병사의 번뇌를 일상의 리듬으로 끌어안을 줄 알았던 초월의 자세와 맞닿아 있습니다.
삶은 헐거운 가죽부대를 이끌고 허락된 몇 개의 산구비를 넘어가는 일이니 이 길의 시작은 출발부터 한 병을 치러내기 위한 싸움일 터, 이승에서의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님을 이미 알아차린 처용은 역신(죽음)일지라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놀아주고자 합니다. 처용의 노래 그윽하고 춤사위 깊어가는, 이 ‘놂’의 시간을 통하여 인간의 몸은 재생과 부활을 거듭 꿈꿀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흙인형들과 놀다
삶의 열락에의 꾸밈없는 추구와 번뇌에 대한 자연스러운 수긍, 이 매혹적인 신라의 노래들은 다시 나를 이끌어 동화 속 나라 같은 토우(土偶)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비파를 연주하는 토우, 피리 부는 토우, 가야금을 연주하는 토우, 벌거벗고 춤을 추는 젊은 토우들… 음악과 술과 시와 춤을 사랑했던 신라인들의 기지와 유머가 넘쳐나는 흙인형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산다는 일이 뭐 그리 욕될 것도, 번뇌스러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흙의 몸으로부터 스며나온 이 흥겨운 가락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삶의 환희로운 대목을 향해 흘러넘치고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모든 자연스러운 출렁임들이 흙의 온기 속에 그대로 살아납니다.
벌거벗은 채로 앉아 있는 두 여인을 가만 바라봅니다. 한 여인은 앉아서 아이를 낳고 있는 토우입니다. 부푼 배와 벌어진 성기, 숨을 조절하려는 듯 두 손을 배 위에 올리고 다리를 벌린 채 앉아 있는 여인에게서 이제 곧 어머니가 될 한 여자의 열에 들뜬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신라의 여인들은 이렇게 앉은 자세로, 자신의 육체성에 몰두하며 아이를 출산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토우는 유방과 성기가 두드러지게 강조된 여인입니다. 이 토우를 빚은 손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육체는 단순한 열락의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기 몸의 미세한 느낌에 몰두하고 있는 듯도 하고, 막 아이를 낳은 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어머니 된 이의 흡족하고도 경이로운 느낌을 만끽하고 있는 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낳고 있는 여인이 얼굴의 생김새와 유방이 과감하게 생략되고 아이 머리 크기만큼 벌어진 자궁문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이 토우에게서는 얼굴의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유방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릴 준비를 마친 어머니의 육체일까요. 소금기 섞인 땀내음이 희미하게 풍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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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를 지고 가는 사람,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웃는 얼굴, 절하는 아이들과 어머니, 수줍게 웃고 있는 여인, 죽은 이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 사냥하는 사람 등 인간사의 희로애락의 순간들과 뱀, 개구리, 호랑이, 독수리, 두더지, 소, 잉어, 불가사리, 게·가재, 거북, 닭, 개, 말, 족제비, 개미핥기, 원앙, 올빼미에 이르기까지 순간의 호흡 속에서 목숨을 얻어 나온 듯한 이 흙인형들은 신라를 꿈꿀 때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될 것들입니다.
조금은 따분하기도 한 한적한 오후에 뭔가 재미난 것이 없을까 궁리하던 어린아이들이 마당가의 흙을 조물락거려 만들었을 것도 같고, 수염이 거뭇해진 사춘기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뭔가 제 깜냥에는 음탕한 어떤 것을 만들어보려 하다가 제풀에 쑥스러워하며 빚어낸 것들일 것도 같고, 밥 뜸이 들기를 기다리던 시누이와 올케가 심심파적삼아 빚어놓고 이것 좀 봐! 참 예쁜 원앙이지!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을 것도 같은, 이 아무렇게나 빚은 듯한 흙인형들에는 기이한 천진성과 해학이 배어 있습니다. 꾹꾹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빚어내 손톱으로 눈 코 입을 슥슥 그어놓은 것 같은 토우들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제각각이 타고난 성정이 독특하게 발현되어 있어 꼭 그 짐승의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순간의 생동감이 있습니다. 이 단순하고 순진한 소망들 속에 삼라만상의 만물들이 제 각각이 지닌 생명의 리듬으로 부풀어 오르고 흥겨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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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의 벗은 발
나는 경주박물관의 유리상자 속에서 지루해하고 있던 천태만상의 흙인형들을 깨워 마실을 나가기로 합니다. 햇볕 좋은 푸른 하늘 아래로 내려서니 온몸이 근질거리던 호랑이와 갈매기 토우가 제일 먼저 좋아라 떠들썩합니다. 그런데 제멋대로일 것만 같던 이 흙인형들이 내처 달음박질쳐 달리지 않고 내 손을 이끌어 아름다운 부처의 얼굴 앞에 서게 합니다.
폴짝거리며 장난치던 토우들이 석조관음보살입상의 발등을 타고 오르더니 관음보살의 발등을 토닥거려주고 호호 입김을 불어줍니다. 신 과일을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코끝이 시큰해져오는 푸른 겨울 하늘을 등지고 묵연히 서 있는 관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만 눈물이 맺힙니다. 중생의 소리를 듣는 보살이라 했던가요.
내 앞에 돌로 선 이 관음은 먼 길을 헤치고 아이를 구할 약을 구해오는 어머니의 모습 같습니다. 피곤에 지쳐 등을 약간 구부리고 고개를 설풋 떨군 채 마당을 들어서는 고단한 어머니. “아가… 아프지 말거라, 아가… 죽지 말거라” 혼신으로 염하며 어렵게 구해온 약을 들고 방문을 밀치는 어머니. 발등이 붓고 굳은 살이 터져 아픈 관음의 발이 차가운 댓돌을 디디고 있습니다.
몇몇의 토우들은 하반신을 잃어버린 석조여래입상에 기대어 말이 없습니다. 섬세한 조각의 광배와 아름다운 눈썹을 지닌 이 여래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깊은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그 슬픔은 격정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속으로만 조용히, 울음에까지는 차마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견디고 있는 인고의 슬픔입니다.
이 아름다운 얼굴을 조각해 낸 장인의 어떤 마음이 숨결로 배어버린 것일까요. 부처의 얼굴들은 죄다 인간을 닮아 있고 아름다운 얼굴의 부처에게서 나는 한사코 슬픔의 여울을 만나고만 있으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의 결들을 통틀어 슬픔만큼 전염력이 강한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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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리고 슬픈 부처들에 비하면 석굴암의 본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는 완전자가 담지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지요. 그것은 교교한,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인간적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순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석가가 보리수 밑에서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손모양-편집자 주)의 수인을 하고 있는 그의 자태는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합니다.
하지만 나는 비도 맞고 눈도 맞고 찬바람도 맞으면서 구부정하게 선 낭산 석조관음보살과 하염없이 슬픈 낯빛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장항리 석조여래입상 앞에서 자꾸만 발길이 머뭇거립니다. 흙인형들이 발등과 어깨에 올라타고 후후 아직도 입김을 불어주고 있는 관음과 여래는 슬픈 존재이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부처의 나라
부처의 나라를 보러 갔다가 부처는 못 보고 아름다운 손 하나를 만났습니다. 삼십여 년 세월을 공들여 만들어낸, 돌과 나무가 절묘하게 몸을 섞어 돌도 나무도 아닌 불국토로 탄생한 참으로 아름다운 절집, 불국사를 천천히 거닐다가 비로전에 들었지요. 진리 자체이므로 설법하지 않는다는 비로자나불은 하나의 손 안에 하나의 손가락을 말아 쥐고서 너는 왜 여기에 있느냐, 내게 묻습니다. 나는 서둘러 비로전을 빠져나오다가 전각의 뒷편에서 돌탑을 쌓고 있는 아름다운 손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름난 고찰이 있는 산길을 오르다보면 흔히 만나게 되는 돌탑들. 숱한 사연을 지니고 오고 간 길손들이 하나 둘씩 쌓아올린 자그마한 돌탑들을 만날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습습해지고 나는 그 습기 속에서 따스한 입김 같은 파동을 만나게 되곤 합니다. 수천 수만의 크고 작은 돌탑들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고 주위에 흩어져 있는 돌들을 찾아내어 그저 쌓아올린 것인데도 기막힌 조형적 미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공동 창작 예술인 셈인 산사 근처의 돌탑들이 아름다운 것은, 백 개의 돌탑 안에 천 명의 기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며 누군가 앞서 쌓아놓고 간 기원의 말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마음이 발원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사내가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를 들어 누군가 먼저 쌓아놓은 돌 위에 조심스레 겹쳐 올리는 바로 그 순간의 떨림과 바로 그 순간의 마음이 부처의 나라에 드는 마음이 아닐는지. ‘부처의 나라’를 형상화해 놓은 이 아름다운 절집보다 저 자그마한 돌탑 하나가 문득 더 커 보입니다.
저자에 들어가서 손을 드리우다
경주의 아침은 세속 도시의 흥성스러움과 무덤 속의 적멸이 기이하게 살 부비며 깨어납니다. 토박이 경주 할매들의 허름한 해장국집을 찾아 해장국을 시킵니다. 단출하고 맛깔스럽게 밥상이 차려지고 나는 국물을 한 술 뜨다가 숟가락 닿은 자리에서 짜그랑 하고 떨어지는 별똥별을 만납니다. 가만 들여다보니 국그릇 저 안쪽에 오롯하게 서 있는, 지난 밤 내가 오래도록 서성였던 첨성대도 보입니다. 국그릇 속에서 달이 뜨고 지고 은하수가 흘러가고 바람이 고이고… 별을 관측하기에는 너무도 뚱딴지 같아 보이는 첨성대에 올라 꿈꾸는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신라 사람이 보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하늘을 살피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으니,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날 때 몸가짐을 삼갔으며 가뭄이 들어 마른하늘이 계속되면 왕은 반찬 수를 줄였다고 하지요.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 알며 우주 저편의 미지의 숨결이 오늘의 일상을 돌보아 줄 수 있기를 기원한 신라의 마음이 가장 ‘신라적인’ 것으로 발현된 건축물이 첨성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유머러스한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이 건축물은 다양한 상상력을 촉발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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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순례자 선재 동자가 보았던 하나의 탑 속에 들어 있는 수천의 탑들처럼, 우주를 덮고 있는 인드라[Indra:고대 인도의 영웅신. 동남아 여러 민족과 종교의 신화에서도 존재하며, 불교에서는 강력한 신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인 석제환인(釋提桓因) 또는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하며 법(法)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편집자 주]의 그물처럼, 우주를 꿈꾸고 우주와 연결되고자 했던 신라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자리를 스스로 보호할 수 있었더라면 천년의 신라는 한층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란 흔히 천년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고즈넉한 골짜기의 여섯 마을에서 출발하여 삼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신라는 출발했던 지점인 서라벌로 오그라든 채 멸망하고 말았지요. 활기 넘치고 개방적인 문화와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계급의 질서가 공존했던 사회, 신라의 백성들이 창출했던 생동감 있는 문화의 자양분들은 고르게 분배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소수의 귀족 계급에게 정치 경제 문화의 풍요로움이 독식되었고 자신의 나라로 편입시킨 다른 모든 지방의 독자적인 생기가 거세된 채 신라의 중심이자 신라의 전부이려고 했던 서라벌은 지금 무덤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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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그릇 속에 든 첨성대를 빤히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쓸쓸해져 서둘러 후루룩 국물을 들이킵니다. 무수한 입술이 스쳐갔을 숟가락이 다시 내 입술을 스쳐 내일이면 다른 누군가에게 따순 국물 한 모금을 떠 넣어주게 되겠지요. 국물을 조금 더 달라고 청했더니 머리칼 희끗한 주인 할머니가 살뜰하게 고명을 새로 얹은 국 한 그릇을 밥상에 내어 주십니다. 투막집 같은 손이 밥상을 자분자분 쓰다듬고 지나가고, 문득 문 밖이 소요스러워지네요. “소 피예요! 소 피!” 그릇을 들고 주인 할머니가 소의 피를 받으러 나갑니다. 어느 틈에 해장국집 즐비한 그 거리의 아낙들이 그릇 하나씩을 챙겨들고 나와 있습니다. 트럭에서 막 내려진 고무통 속에서 뭉클하게 김이 오르는 검붉은 소의 피. 바가지째 퍼주는 붉고 비린 피 냄새 속에서 나는 문득 십우도의 마지막 장을 떠올립니다.
입전수수(入廛垂手: 육도중생의 골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으로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함. 이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십우도(十牛圖)」이다 - 편집자 주)라 하던가요. 진아(眞我)를 찾아 떠난 구도의 길에서 ‘나’를 깨달은 이가 저자의 무수한 ‘나들’ 속으로 들어와 손을 드리운다는. 흥성스러운 저자의 소음들 속에서 에밀레종 소리를 환청처럼 듣습니다. 끓는 쇳물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소. 그지없이 아름다운 에밀레종에 새겨진 공양천인상이 두 손으로 받쳐들고 공양하고 있는 것이 저 더운 피 한 바가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을 사는 일이란, 피 한 바가지를 시주 받고 피 한 바가지를 시주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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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첨성대는 아직까지 천문 관측대였다는 의견과 천문 관측소에 설치된 상징물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이었든, 첨성대는 몇 가지 점에서 후대의 우리들에게 큰 매혹덩어리가 아닐 수 없다. 30cm 높이의 길쭉한 화강석 362개를 차곡차곡 27단까지 쌓아올려 축조한 이런 석조건축물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것으로, 그 단순 소박한 균형미가, 아름답다.
또 쌓아올린 27단은 선덕여왕이 27대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맨 위의 정(井) 자 모양의 돌과 합하면 별자리의 기본 수인 28수와 같으며 여기에 기단석을 합하면 29로 음력 한 달의 길이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사용된 362개의 돌은 1년, 가운데 네모 창을 제외한 위아래는 각각 12층으로 1년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또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井字石)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을 향하고 있다한다. 놀랍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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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터를 두고는 두 가지가 특히 놀랍다. 첫째, 절터와 거기에 세워진 구층탑의 규모. 절터는 동서 288미터, 남북 281미터로 무려 3만평이나 된다. 거기에 세워졌던 구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22.2미터에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 탑의 높이는 무려 약 80미터였다고 한다. 요즘의 20층 건물에 맞먹는 높이에 송신탑이 하나 더 얹혀진 셈이다. 둘째, 사찰을 완공한 기간.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은 진흥왕 14년(553), 17년만에 담장을 완성하고 장륙존상은 그 22년 후, 금당은 또 그 32년 후, 마침내 구층목탑을 끝낸 것은 92년 후인 645년. 그러니까 거의 1백년에 걸쳐 절을 지은 것이다. ‘빨리빨리’에 젖은 요즘의 우리들에게 이런 선조들이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럽다. 황룡사 구층탑은 고려 때까지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며 보존돼오다 13세기 몽고군의 침략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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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와 그 주변의 유적지를 돌며 입장하려다 보면 500원에서부터 3500원까지의 입장료들을 내고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차라도 몰고 가면 2000원 정도의 주차료를 덧붙여 내야 한다. 경주 박물관은 입장료가 400원(19~24세는 200원) 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주차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의 그 어느 유적지보다 진귀하면서도 많은 볼거리로 인해 다른 곳을 들르면서 주차료에 입장료에 귀찮아지고 찜찜했졌던 기분들이 확 걷히는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20만점 되는 소장 유물 가운데 2500여 점 이상을 전시하고 있다. 경주 여행시 시간 여유를 두고 ‘반드시’ 둘러보아야할 곳이다. 여기서 경주 시내의 유적지마다에 무는 입장료와 주차료에 대해 한 마디. 이곳저곳 입장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매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며 곧바로 불평·불만으로 이어진다. 한 장의 입장권으로 모든 문화 유적지를 관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 한 장 구입으로 몇몇 시설을 자유로이 둘러볼 수 있는 입장권 제도는 이미 몇몇 놀이공원에서도 시행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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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의 ‘경주 수학 여행’시 받은 가장 큰 인상(기억 또는 충격)은 기차를 타고 경주시내로 들어가다 느닷없이 닥쳐보게된 무덤 ‘들’로 인한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왕릉 같은 것을 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 큰 무덤들을 한꺼번에 한곳에서, 수시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놀라웠다.
이제 지금, 죽은 한 명의 왕 또는 왕족을 위해 이토록 큰 무덤들을 쌓느라 동원돼야만 했던 백성들과 물자들을 떠올리는 건 부질없는 일, 신라 천년 그리고 이후 또 천년 동안 이 무덤들은 산 자들을 맞는 큰 품으로 남아 그늘과 위안과 장식이 되어온 것임은 사실이다. 대릉원, 노동동, 노서동 등 고분군 중 특히 태종무열왕릉 바로 위쪽에 있는 서악 고분군이 아름답다. 무덤이 아름답다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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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의 또 한 가지 매력은 쉽게 바다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감포는 감은사터와 대왕암이 있는 곳에서 7번 국도로 10여 분 북쪽으로 달리면 닿는다. 작은 포구지만 들고나는 고깃배와 바닷비린내로 제법 활력 있는 포구임을 알 수 있다. 포구에만 가면 볼 수 있는 공통 장면들-억척스레 바지런을 떨며 사는(떨어야 살 수 있는?) 사람들, 이곳 역시 예외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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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경주 음식은 팔우정 해장국밖에 없데이.” 경주 특산 음식으로 황남빵과 경주 법주 정도는 떠올릴 수 있는 우리에게 경주토박이 친구가 들려준 얘기는 다소 의외였다. 해장국? 녀석이 술을 좋아해서겠지? 의심 반으로 찾아간 팔우정 해장국 골목. 김치 장아찌와 콩나물과 해초, 메밀묵 몇 점이 한술 얹어준 양념장과 함께 맑은 장국 위에 얹혀져 어디서도 보지 못한 소박하고 담백한 맛으로 감탄사가 절로 났다.
세 명이 먹다 일행 중 한 명이 한 그릇을 더 시켰는데도 공기밥까지 모두 합해 9000원. 경주역 근처 팔우정 로타리에서 시청으로 향하는 왼편에 20여 곳이 줄지어 있다. 경주 여행 기념으로 남녀노소 누구나에게 환영받는 경주시 지정 전통 황남빵집도 근처에 있다.(팔우정 해장국집, 054-749-2391 / 황남빵, 054-749-7000) | |
‘알면 보인다’고, 모르고 가는 것보단 역시 알고 가는 게 낫다. 경주에 관한 수많은 책 가운데 유명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말고도 하일식이 지은 『경주역사기행』과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생활사박물관 ·5(신라생활관)』을 권한다. 『경주역사기행』은 경주와 그 주변에 산재한 역사 유물들에 대한 적확한 사진과 설명으로, 『한국생활사박물관』은 당시 경주인(신라인)들의 구체적 삶에 관한 풍부하고 세밀한 기술과 묘사로, 겉핥기로 지나쳐오던 경주 여행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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