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과 여행]/여행가고 싶은곳

남해 간다고 /그여자 울면서 떠나갔네

현정 (炫貞) 2007. 10. 20. 12:15





남해에 갈 겁니다. 누가 여행목적지를 물어오면 나는 습관처럼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봄바람이 먼저 전해오는 남해 금산, 거기 돌 속에 들어간 한 여자와 나란히 서서 보리암 일출을 볼 겁니다, 라고. 그런 내게 남해가 고향인,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그가 말했다. 나중에 나와 함께 가자, 가서 큰아버지의 고깃배를 빌려 고기도 잡고 다도해를 돌자, 내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때, 그때 함께 가자. 나는 그러마 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었으나 여수 혹은 삼천포까지 가서도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남해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남해에 갈 거라고 말했다.


남해대교 입구에 선다. 다닥다닥 붙은 언덕 집들 중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있겠지, 그리고 여전히 그의 식구들이 살고 있겠지, 입구에 서서 생각한다. 공터 한편에 삼단으로 쳐진 빨랫줄을 무심히 바라본다. 줄에 걸린 것은 파래보다 색과 향이 더 진한 감태다. 바람결에 물기를 빼앗긴 감태는 꼭 홀로 남은 노인의 고집스런 수염 같다. 노인의 푸른 수염이 버석버석 휘날리는 것을 보며 나는 조금 주저한다. 그와 약속했는데. 함께 남해에 가기로.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 어디 거제나 여수로 돌아가야할까. 결국 나는 남해대교를 건넌다. 이리 아니면 영영 가지 못할 것 같아서. 돌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남해 금산의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나는 아끼고 아껴 두었던 사탕을 꺼내 빨듯 조심스럽게 남해로 가는 다리를 밟는다.

나무들이 물고기를 부른다
남해대교는 노량 앞바다를 가로질러 섬 남해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파도가 치면 그 물결이 이슬방울들이 뭉쳐 만든 다리처럼 보인다는 노량(露梁). 이슬다리라도 건너듯 가슴 한쪽이 아리다. 사백여 년 전 여기서 충무공이 죽었다. 충무공의 시신은 노량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포에 눕혀졌고 며칠 뒤 노량 나루터 언덕 위로 옮겨져 고향으로 갈 때까지 여섯달 동안 가매장되어 있었다. 남해대교를 건너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바로 이곳 충렬사다.


충렬사의 나무들은 왜 저리 힘들게 서 있는 걸까. 비탈에 선 나무들. 옆으로 자라는가지들이 위험해 보인다. 제 힘에 겨워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뽑혀버리지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자세히 보니 가지마다에 힘이 넘친다. 저 든든한 가지들에 새순이 돋고 녹음이 지면 듬직하겠다. 폭풍이 몰아쳐도 끄떡없을 듯하다. 노량을 건너온 바람이 함성소리처럼 나무들 사이를 휘감아돈다. 그 함성들 가운데 높이 솟은 나무 한 그루 하늘을 호령하고 있다.
내처 관음포까지 간다. 관음포 가는 길. 아직 피지는 않았지만 길 양쪽으로 터널을 이룬 나무들은 분명 벚나무들이다. 봄이 오면 이 길은 화사한 꽃 터널이 되리라. 금방이라도 펑펑 꽃살을 터뜨릴 듯 꽃눈이 통통히 올라와 있는 걸 멀리서도 짐작할 수 있겠다. 곧바로 첨망대로 향하는 길을 접어든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찬찬히 걸으면 좋을 오솔길이다. 사람 키보다 조금 큰 동백나무가 사열단처럼 단정히 서 있다. 그 뒤로 동백나무들을 호위하듯 소나무들이 바싹 붙어 섰다. 혼자 걸어도 저 나무들이 있어 외롭거나 두렵지 않겠다. 함께 걷는 벗처럼 나무들은 뽐내지않고 묵묵히 내 그림자를 따라온다. 첨망대에 올라서서 수면 위에서 부서지는 햇살과 그 가운데 뜬 크고 작은 섬들을 본다.









나무들. 남해의 곳곳에서 동백과 매화를 만나기도 하는데 내 마음은 아직도 겨울나무다.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다. 바다와 섬들이 숨었다가는 얼굴을 내밀고 포구마다 한적한 마을이 앉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교문도 없고 창문도 깨어진 황량하기만 한 폐교다. 이 섬에는 폐교가 많다. 바다가 보이는 교실. 넓지 않은 운동장 둘레에 사철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다. 울타리 바깥쪽은 곧바로 바다로 이어진다. 멀리서 보니 학교 자체가 하나의 반도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 도시의 어느 한구석에서 따뜻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성성한 울타리 위에 봄 햇살이 여전히 따사로운데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폐교 울타리까지 보았으니 남해의 숲을 보아야겠다. 남해의 숲을 보기 위해서는 물건리로 가야한다. 물건리 바닷가 해안의 방조어부림(防潮魚府林)은 고기떼를 모으고 바람을 막을 요량으로 만든 마을숲이다. 해안선을 따라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이 띠를 만들고 있다. 물고기들이 그 푸른 선을 보고 그쪽으로 온단다. 나무들은 물고기를 부르고 해풍은 삼킨다. 숲을 이룬 나무들이 쏴아쏴아 파도 소리를 낸다. 숲에 들어서니 벌거벗은 겨울나무들인데도 숲의 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가지만 앙상한 그만그만한 나무들인데, 이 숲엔 느티나무를 비롯해 팽나무 푸조나무 이팝나무 모감자나무 등과 청미래덩굴 같은 식물들이 어울려 산단다. 여름이면 각각의 이파리들을 뽐내며 푸른 숲이 되리라.


동글동글한 조약돌을 밟으며 숲을 거닌다. 나는 자주 걸음을 멈추고 서서 숲의 소리에 귀기울인다. 파도소리와 함께 색감이 다른 새들 소리도 들린다. 집중해서 들으면들썩이는 흙 소리까지 들린다. 어디선가 목탁소리와 염불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나는 염불 소리를 따라 빠르게 걷는다. 숲에서 나오니 훤히 트인 바다다. 멀리 등대도 보인다. 그 바다를 향해 아낙들이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하고 있다. 여승의 고운 염불소리와 목탁소리에 따라 아낙들의 허리도 함께 굽혀진다. 힘에 부치는지 돌바닥에 주저앉아 절을 하는 이도 있다. 그들은 무얼 향하고 무얼 염원하는 걸까. 고향 떠나 타지 생활하는 아들의 건강을 기원하기라도 하는 걸까? 나는 한참 동안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발길을 돌려 숲을 빠져나올 때, 숲의 나무들에 머물렀던 파도소리와 함께 낮은 염불 소리가 내 뒷머리를 잡아챈다. 나무들이 부르는 것이 다만 물고기들이었을까. 나무들은 길 떠난 아이들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푸른 계단을 오르다
남해의 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차라리 고즈넉한 호수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살을 후비는 바다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굴곡이 심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작은섬들이 적요하게 앉아 있다. 섬들은 낚시꾼들의 푸르게 단장한 좌대 같다. 그곳에선 치열한 삶의 그물질보다는 물고기들과 노니는 빈 낚싯줄만 있으리라. 걸음을 멈추자 시간은 정지하고 풍경만 남는다. 해면의 햇살도 현실감을 잃고 한 장의 명징한 사진속 빛더미처럼 분해된다. 저 풍경 속 정박해 있는 고깃배 속으로 들어갈까. 들어가 시간을 붙잡아볼까. 수묵화를 닮은 해안의 풍경이 문득문득 내 발목을 붙든다. 호수 같은 바다에 정신을 빼놓다보니 정작 남해 땅을 보지 못했다. 찬찬히 둘러보니 비탈비탈마다 초록빛이다. 바다로 곧바로 떨어질 듯한 벼랑 끝도 초록 밭, 담벼락 앞 자투리땅도 초록 밭이다. 조금의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드는 밭이 처연하게 아름답다. 무엇이 저리도 풋풋한 초록을 만들었을까, 생각하는 사이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예쁜 가천마을에 도착한다. 산비탈에서부터 바다로 이어지는 초록 계단. 차를 세우고 계단을 밟아 바다로 내려간다. 초록 물을 들인 것은 마늘 줄기다. 크게 벌린뼘만큼 자란 마늘. 예전에 여수 시내까지 가서 똥을 거두러 다녔던 남해 똥배가 있었다더니, 오랜 세월 일구어졌을 계단식 밭과 기름진 그 땅에서 꼿꼿하게 자란 줄기들마다 윤기가 흐른다. 나는 밭 한가운데 쭈그려 앉아 알싸한 마늘냄새 흙냄새를 맡는다. 바닷가에 다 이르도록 마늘밭 계단은 끝간데 없이 이어진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내려가다 두 미륵을 만난다. 남녀의 성기를 닮은 암수바위. 아이를 낳기 위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건강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나란히 선 두 미륵에게 치성을 드렸으리라. 여행객들이야 그저 짓궂은 웃음으로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촛농과 제사음식들을 보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귀이 여기는지 가늠이 된다. 어디선가 아주 작은 날벌레들이 날아와 암수미륵 사이에서 꿈결인듯 배회한다. 벌써 하루살이들이 있는가. 아무려나, 보이지 않는 날갯짓을 이우는 해가 감싸니 무대 위 조명을 받으며 추는 군무 같다. 어느새 미륵은 보이지 않고 사소한 벌레들만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길목의 어느 한 지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이곳은 어쩌면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인지 모른다. 푸른 계단을밟아 천상의 공간으로 가다 나는 잠시 그 길 양끝에 선 문지기 부부를 만났는지도.그리고 그 벌레들은 떨어져 선 부부를 이어주는 작은 까치들은 아닌가.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한밤의 전화. 밤에 전화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제 얘길 하고 싶은 게다. 그들에게는 그저 그랬구나, 하고 대답해 주기만 하면 된다. 길을 제시하거나 반론할 필요는 없다.
수화기 저편의 사람이 어디냐 묻는다. 나는 남해라고 대답한다. 남해 어디? 남해의 남해. 남해의 남해? '남해 금산'의 남해! 그제야 그네는 아 남해 금산, 한다. 언제부턴가 남해와 금산은 한 단어처럼 붙어 있기 시작한 것을 실감한다. 남해에 발을 들여놓는순간 나 또한 그 시를 되뇌이고 있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속에 나 혼자 잠기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나친 난방 때문에 몇 번이고 깨어 물수건을 갈아 널고창문 밖 어둠뿐인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수화기 속에서 지지직거리던 그네의 낮은 목소리도 떠올랐다. 해는 일곱 시가 조금 넘어서 뜰 예정이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는데, 일출을 볼 수 없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하며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 속으로 나간다.


남해의 중심에 금산이 있다.

이성계가 이곳에 와 백일기도를 올리고서야 비로소 왕조창업을 이루었다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고 싶은 마음으로 비단 산[錦山]이라 이름지었다는 금산. 어둠을 걷어내며 금산이 다가온다. 빽빽이 들어찬 낙엽수들 사이로 불쑥불쑥 솟아오른 키 큰 전나무가 부드러운 선율을 그려낸다. 그 화음에 불현듯 끼여드는 까마귀 소리. 까마귀 한 마리 보리암 쪽으로 앞서 날아간다. 까마귀가 먼저 간 길을 눈으로 쫓는데 또 한 마리 울며 지나간다. 두 마리 세마리, 까마귀들 한 곳을 향해 날아간다. 저것들은 도대체 어디로 저리 몰려가는 걸까.


앞서 갔던 사람이 손짓을 하며 재촉을 한다. 해가 떴단다. 붉은 해다. 구름을 뚫고 붉은 깃털을 털며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일점선도(一點仙島). 남해섬을 한 점 신선의섬이라 했던가. 신선의 섬이 아니라면 저런 일출은 보여줄 수 없으리라. 바다 안개 위로 펼쳐지는 형언할 수 없는 색의 향연. 그 위에 적요하게 떠 있는 섬들. 탄성조차 함부로 지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아름답다, 나는 내내 그 생각만 했다. 호흡이 멈춰질 정도로. 어느새 태양은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제 안에 태양을 숨긴 구름이 이젠 제가 붉게 물든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뒤를 본다. 보리암 뒷편에 모인 까마귀떼들. 아까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몰려가던 까마귀들이 여기 다 모였다. 너희들도 보았니? 그래서 울지도 않고 그리 조용히 앉았니? 남해바다에 발을 담그고 허리참에는 구름띠를 두른 금산. 그 금산의 이마참에 자리잡고 앉아 남해 하늘 끝을 내려다보는 보리암에서 까마귀들과 함께 바라보는 일출. 신선이 되어 선 기분이다.


낙산사와 보문사의 관음보살상과 함께 손꼽히는 해수관음보살상 앞에 향을 꽂는다. 나는 한밤에 전화를 한 그네와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도시의 어떤 이들을 위해 합장을 한다. 보리암 뒷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화엄(華嚴)의 글자를 닮았다는 화엄봉을 지나 제법 가파른 길을 걷는다. 불쑥불쑥 솟은 금산의 바위들은 저마다 무어라도 품은 듯 기묘하다. 여자거나 두꺼비거나 상사병에 죽어 된 구렁이거나 거북이.무엇 하나 쉬이 넘겨지지 않는 그 돌들을 나는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든 여자가 손짓을 하며 들어오랄 것 같아서, 나도 따라 돌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아서. 나는 땅만 보며 걷는다.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금산의 정상. 그 중심에 봉수대로 쓰였던 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불을 지피면 서울 남산 봉수대까지 일곱 시간이면 전달되었단다. 망대에 오르니 사방이 바다다. 안개 속에 명암을 달리해 떠 있는 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려수도가 한눈에 펼쳐진다. 산의 나라인가 싶었더니 섬의 나라이구나, 바다의 나라구나, 나는 또다시 숨을 멈출 수밖에 없다. 왜 남해 금산인지, 남해와 금산은 한 몸이 될 수밖에 없는지 금산에 올라 알겠다. 더 이상 해를 바라볼 수 없을 때까지 나는 거기 망대에서 빙글빙글 돌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가 둥근 배낭을 짊어지고 금산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푸른 바다와 하늘에 푸르게 젖는다.


유배지에서의 달콤한 꿈
서울에서 천리 길. 남해는 참으로 멀다. 선뜻 짐을 싸고 떠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오랜 망설임 끝이어서 그랬을까, 남해 금산은 더욱더 애틋하다. 내일을 약속받지 못한 유배객들이라면 서울은 더욱 멀었으리라. 남해는 유배의 땅. 하물며 여기서 배를 타고 더 들어가야 하는 노도에서 삭막한 유배생활을 해야했던 김만중은 어떠했을까. “섬은 아득히 구름 저편에 있고 방장, 봉래산도 가까이 보인다. 일가 친척들과 떨어져 혼자 외롭건만 남들은 나를 신선으로 바라보겠구나.”(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로 이름난 조선조 학자 김만중이 남해 노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지은 시를 우리말로 푼 것이다. 그는 조선 숙종 15년(1689)에 노도로 귀양와 3년 간 살다 죽었다-편집자 주) 남해를 일점선도라 불러 표현한 것도 이곳으로 유배온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에서다. 유배지였기에 그런 글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막연히 짐작해본다. 나도 짐을 싸들고 남해로 유배와야 할 것인가, 문득 짓궂은 생각마저 든다.


남해를 떠나기 전 나는 또 여러 곳을 서성인다. 유배지 노도와 오징어를 부려놓느라 부산한 미조항과 창선교의 죽방렴을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걸음은 더욱 느려진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면서 나는 외려 천리 유배길을 떠나는 기분이 되었다. 마치 여덟 선녀와 실컷 노닐다가 그것이 꿈이었음을 깨닫는 『구운몽』처럼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느낌이었다. 고향 땅이 천리인 어떤 이들에게는또한 서울이 유배지일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결국 나는 남해대교를 건너지 못한다. 창선교를 건너 단항에서 사천으로 가는 배에오른다. 남해대교를 건너면 남해를 완전히 떠나는 것 같아서. 서울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해의 어느 섬을 계속 여행중이라고 스스로에게 뇌까린다. 그리고 갑판 위에서서 멀어지는 남해의 섬들에게 인사를 한다. 다녀올게. 곧 그를 데리고 이리 올게.
너를 떠나 서울에 유배된 그를 데려올게. 나즈막이 속삭인다. 남해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언제든지 오라고, 지치고 지칠 때 한 점 신선의 섬으로 쉬러 오라고, 달고 단 꿈을 꾸게 해주마, 손짓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남해에 간다고 말할 것이다. 남해에 갈 겁니다. 남해금산에 올라 까마귀들과 일출을 바라볼 겁니다, 아주 달콤한 꿈을 꾸겠지요, 라고.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서 대포를 쏘게 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기술한 거북선의 모습이다. 이런 묘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들 머리 속에서는 거북선의 겉모습 정도는 대략 윤곽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어릴 적부터 익숙해져 왔다. 그렇다면 그 속은? 크기는? 1598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 바다, 남해대교 밑 충렬사 바로 앞에 건조돼 전시되어 있는 거북선 모형에 들어가 보면 이런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남해 어디를 가든 조금의 틈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이런 논밭들 볼 수 있다. 일찍이 농사에 쓸 거름으로 여수의 똥을 배에 싣고 오던 남해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 악착스럽던 생활력, ‘남해 똥배 기질’을 땅에 펼쳐보인 것이 단 한 뼘의 땅도 그냥 두지 않는 이 계단식 논밭들이다. 2월 중하순 경에 찍은 이 사진의 녹색 작물들은 모두 마늘로서, 2400여 헥타아르 되는 남해의 마늘 재배 면적은 경남 지역의 약 44%, 전국적으로는 6%를 차지한다고 한다.





일출은, 마음을 먹고 다짐을 하고 무슨 큰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산을 떨어도 겨우 볼까말까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때의 이름난 일출지를 가보면 헛걸음에다 사람 떼에 치여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반대로 일몰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예기치 않게 오는 경우가 흔하다. 사람도 차도 없고 시간도 놓친 남해 어느 이름 모를 작은 언덕, 마음의 허방을 때리며 우연히 닥친 일몰, 그 아름답고 장엄한 허무라니!





보통 남해 금산을 오르려는 여행객들, 특히 금산 보리암에서의 일출을 보고자하는 여행객들은 그 근처 보리암 입구의 여관들에서 하룻밤 정도는 자게 마련이다. ‘통기타 라이브 레스통랑’은 보리암 입구의 3-4개 여관들 사이에 있는 자칭 '남해 명소'로서, 여관방에 자리를 잡은 후 잠들기에는 너무 이르다 싶을 때 둘러볼만한 곳이다. 밤 9시쯤이 되자 색서폰과 플루트를 가진 사람이 정말로 무대에 나타나 연주를 했다. 앨범으로 듣는 것보다 실감과 충동이 느껴지기는 힘들었지만, ‘라이브’였다. (통기타 라이브 레스토랑, 남해군 이동면 신전리 055-863-5244)





갈치는 성질이 급해 잡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려 회로 먹기가 아주 귀한 생선이다. 공주식당에서 맛본 갈치회(정확히는 회 무침)도 살아 있는 갈치가 아닌 냉장된 것으로, 주로 어린 갈치를 매일 새벽 필요한 양만큼만 구입해 냉장시켜 두었다가 이용한다고 했다. 살아 있는 회를 먹으려면 갈치잡이배를 타야만 한단다. 주인이 집에서 직접 만든 막걸리 식초를 이용해 무친 향긋하고 상큼한 초고추장맛이 큰 비결인 듯 했다. 투박하고 무뚝뚝한 경상도 음식(경상도 분들에겐 죄송)에 지친 객들에겐 충분한 별미. 곁들여 나오는 갈치 속젓 맛도 괜찮다. 2-3인분 한 접시 2만원선. 멸치회는 3-5월에만 맛볼 수 있다. 미조항 수협공판장 바로 뒤 골목에 있다. (공주식당, 055-867-6728)





남해가, 남해 금산이, 수많이 이(젊음)들의 열망과 동경이 되어온 데에는 사실 이성복의 이 시집이 결정적 역할을 해온 것으로 믿고 싶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사랑의 아름다움과 아픔으로 향그럽고 덧없고 눈부셨던 한 때의 젊음들, ‘남해 금산’에 가면 지금도 넘쳐 나겠다. (문학과지성사, 1986,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