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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마산에서도 역사가 시작되었다 <삼진의거>

현정 (炫貞) 2019. 5. 18. 15:42


1919년, 마산에서도 역사가 시작되었다 <삼진의거>


마산이라는 도시에는 3.15의거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3.15의거'1960년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르자, 이에 반발하여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 일으킨 대규모 시위이다.

시위에 참여한 김주열군의 시신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중앙부두에 떠오른

모습을 보고 시민들은 분노했다. 3.15의거는 2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

시위 중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사망하거나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 3.15의거의 전개 과정 / 출처-3.15의거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마산시민의 저항 정신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19193.1운동 당시부터 마산시민의 투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마산 3.15의거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는 마산 3.1운동(구마산장날 시위와 삼진의거)에서 정의로운 마산시민의 역사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마산 3.1운동의 배경


일제의 강제 점령으로 인한 억압과 수탈이 계속되었다. 마산 지역의 농민들은 토지를 박탈당하거나 경작권을 상실했고, 고율의 소작료에 시달려야 했다.

토착상인들은 일제가 마산항을 폐쇄함에 따라 상권을 침탈당했다.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 민중은 분노하며 저항했다. 191931일에 열린 서울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마산 3.1운동의 시작


종교계 인사와 지식인들의 주도로 시작된 3.1운동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직업과 나이를 불문한 거족적 만세시위가 되었다. 김용환은 고종의 국장을 참관하기 위해 두척산(지금의 무학산)에 모인 사람들에게 독립과 항일투쟁의 당위성에 대해 역설하였다.

잇따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학생들은 만세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3.1만세시위에 참여한 변상태와 김관재는 마산으로 내려와, 지역 인사들과

함께 추산정에서 거사를 모의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도중 일제 헌병에 의해

참여한 사람 모두 연행되어 시위가 무산되었다.

추산정 사건 이후 종교계 인사와 학생, 지역 인사들은 끝내 힘을 합쳐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 3.1운동, 구마산장날 시위와 삼진의거


마산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구마산장날 시위와 삼진의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구마산장날 시위'는 장날을 틈타 321, 26, 31일에 총 3차례 일어났다.

'삼진의거'328, 43일에 마산의 진전, 진북, 진동 3개의 면이 연합하여

2차례 일어났다.

구마산장날 시위

구마산장터(현 창동 사거리) / 출처-국내 독립운동 · 국가수호 사적지 홈페이지

1차 구마산장날 시위(1919321)는 마산발 삼랑진행 열차의 기적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시위 주동자들은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고, 이에 따라 장터에 있던 군중도 시위에 뛰어들었다.

시위가 시내까지 이어지자 지나가던 행인들도 시위에 참여해 독립만세를 외친

사람들이 3,000여명에 이르렀다.

2차 구마산장날 시위(1919326)1차 구마산장날 시위로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적을 가진 시위였다. 북마산파출소를 지나

마산형무소에 다다르자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3,000여명이 되었다.

3차 구마산장날 시위(1919331)는 이전 시위에 비해 참여한 인원은

적었지만 구마산장날 시위 중 가장 격렬했던 시위였다.

이 시위에는 형무소 간수(교도관)까지 참여해 제복을 벗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절정에 이르자 총검으로 무장한 일제의 군인과 경찰이 이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삼진의거

마산 삼진의거 재현 행사 / 출처-한겨례신문

구마산장날 시위는 외곽 농어촌 지역까지 확산되어,

마산의 삼진 지역(진전, 진북, 진동)에서의 만세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마산 삼진의거는 3.1운동의 전국적인 절정기에 행해졌다.

외곽 농어촌 지역의 주민들이 인근 지역과의 연계를 통해 계획적, 연속적으로 전개한 민중적 민족 운동이었다.

1차 삼진의거(1919328)는 마산 진동면 고현시장에서 거행되었고,

2차 삼진의거(191943)는 마산 진전면 양촌리에서 거행되었다.

마산 삼진 지역의 만세시위는 마산 시내의 구마산장날 시위와는 별개로,

서울의 3.1운동이 일어난 직후부터 이미 계획되고 있었다.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한 변상태가 마산에 내려와 인근 지역 인사들과 접촉해

각 지역에서 의거를 주도해줄 것을 권고했다. 변상태를 비롯해 권영조, 권영대,

변상헌, 변상섭, 권태용, 백승학, 백운태 등 삼진 지역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거사를

모의했다.

1차 삼진의거(1919328)는 진동면 고현시장에서 백승학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가 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500~600여명의 군중이 시장을 돌고 난 후 진동으로 향하였다.

진동은 일본인들의 집단적 거주 지역이자 일제의 헌병주재소가 있는 곳으로,

만세시위의 목적을 관철시키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나 시위대가 진동에 도착할 당시, 일제는 이미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일제는 비무장한 시위대를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하였고,

시위에 검거된 사람들은 마산형무소에 투옥되거나 태형 및 집행유예를 받았다.

2차 삼진의거(191943)1차 삼진의거에 비해 계획적, 조직적,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고현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후 곧바로 거사 일자와 세부사항을 논의하였다.

시위 주동자들은 독립과 항일투쟁을 역설하며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서 2,000여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나아갔다.

한편 진동 장터에 모인 진북면과 진동면 주민들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걸어나갔다.

삼진 지역의 만세시위 도중 일제의 군인과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이 있었다.

시위대는 일제의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시위에 참여한 군중에서 8명이 숨지고 22명이 다쳤다. 마산에서 일어난 3.1운동 중 가장 격렬했던 만세시위였다.

마산 진전면 양촌리 순국팔의사 묘역 / 출처-창원시 공식 블로그

삼진의거 당시 순국한 8명의 애국지사의 묘 / 출처-창원시 공식 블로그

삼진의거, 3.15의거, 부마민주항쟁, 촛불집회...

마산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마산시민은 꾸준히 연대하며 투쟁해왔다.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다.

비록 각자가 살아온 시대도, 각자의 목적도 다르지만 마산시민의 저항 정신은 여전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마산시민들이, 지금까지 마산시민이 일구어온 그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