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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조산의 산증인-김연희 조산소

현정 (炫貞) 2019. 5. 18. 15:26

    마산 조산의 산증인 - 김연희 조산소


1.2013122. 마산의 합포구에서 <김연희조산사>를 열고 있는 김연희씨를 도시탐방대원들과 함께 만났다.

현재 주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410-5.

전화는 055-246-2973. 그러나 1963년의 마산상공인명감에는 마산시 장군동 4253이 주소이며 전화는 973. 상호명은 조산원으로 되어 있으며

대표자는 김三分이다. 위의 주소는 창원법원 마산지원 바로 뒤편이지만,

뒤의 주소는 장군다리 바로 옆이라서 위치가 다르다.

아마도 장군동 4253에서 현주소로 옮긴 듯이 보인다.

전화번호를 통해 양자의 관계를 본다면 현재는 2973번이고 1963년에는 973번이었으므로 양자는 같은 곳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김연희씨와 김삼분씨의 관계는 의문으로 남는다. 동인 이명인지, 아니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등이다.


이분을 만나고자 한 것은 마산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아직까지도 조산원을

운영하는데다 그 명성이 높은 데 있었다. 당신의 말로는 전국에서 신생아를

제일 많이 받았으며, 또 자신이 받은 아이 중에서도 또 산모도 죽은 이가

없다는 것이다. 죽으면 안된다는 신념으로 아이를 받았다고 한다.


김연희씨는 1929년생으로 현재 86세이다. 태어난 곳은 진주 상대동.

부친은 쌀가게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인들의 요구에 따라 경기도에서 쌀을

사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오빠가 운전하였다고 하니, 집 식구가 모두

이 일에 매달렸던 것 같다. 논도 살 수 있었다. 부자였던 것 같다.

기생들이 많은 집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진주에 있는 봉래초등학교를 다녔다. 17살 때 해방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간호학교에 진학하여 간호사 자격증을 땄다.

또 부산에서 사범학교에 입학한 뒤 뒷날 교사가 되어 부산의 범일동에 있는

성남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일도 있었다. 부산에는 오빠가 살고 있었던

까닭에 그곳에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오빠는 포목상을 하고, 시누이는

메리야쓰 공장을 경형한 덕에 부유하였다고 한다.

 

2. 마산에서 조산소를 열다.

부산에서 25살에 결혼하였다. 시가집은 마산이었다. 54년쯤에 마산에서 조산소를 개업하였다. 조산사 시험에 합격하고 난 뒤였다. 당시 이 시험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태아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놓고 테스트하는 경우가 있었다.

초기에는 하루에 7~8명을 받았고 10명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50년대에 조산소가 출산 장소로서 애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출산 시 위험한 경우 산부인과로 보냈다. 자리를 잘못 잡은 태아는 손으로 만져 제 자리를 잡도록 해 주었다. 손가락이나 다리에 장애가 있는 영아를 출산하면 산모가 이를 데리고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출산은 산모 혼자서 감당할 일은 아니었다. 남편이 옆에서 돕도록 권하였다. 산모가 힘을 쓸 때 잡아주고 땀을 닦아 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심지어 남편 중에는 출산하는 과정에서 기절하기도 하였다. 쌍둥이를 받는 일은 즐거웠다고 한다. 하나를 낳은 뒤에 다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였는데 다시 산통이 오면 틀림없이 또 다른 영아가 출산 준비 중이라는 것이다. 세쌍둥이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 당시 아이 아버지가 기절하여 찬물을 끼얹어서 깨어나도록 하였다.

기뻤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출산 뒤 질식한 5대 독자를 인공호흡으로 살려낸 일을 들었다. 당시 파티마 병원으로 직행하였는데, 병원에서는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해낸 결과 병원에서는 이것을 매우 신기한 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또한 5.5킬로의 아이를 순산한 뒤, 산모는 날아갈 듯이 기뻐한 경우도 있었다. 30여 년전에 5대 독자를 받은 적도 있었다. 당시 독자였던 부모도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그는 군대에 갔다 온 뒤 찾아와 만났으며, 안아주고 용돈도 주었다고 한다.

김연희씨가 특별히 아프게 기억하는 일은 5명 쌍둥이가 유산한 때였다. 손으로 꺼냈으나 모두 다 죽었던 것이다. 당시 친정어머니는 기절하였다고 한다.

산아제한 운동이 벌어졌을 때 홍보차 시골에도 갔었다. 어떤 경우 노인으로부터 맞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무슨 놈이 남의 안방까지 간섭하는가 하는 이유였다. 아마 1960년대 이후 정부에서 추진한 산아제한정책에 홍보요원으로 참여한 것 같다.

최근에는 문을 열어놓고 있지는 하지만 직접 아이를 받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가 든 탓도 있고, 또 출산을 위해 조산소에 들르는 산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산모의 상태를 진단해 주는 일은 아직도 하고 있으며, 종종 자신의 출산일시를 몰라 방문하는 부모가 있다고 한다.

그의 조산 철학은 자연분만이 순리라는 것이다. 당연히 조산원의 주요 임무는 자연분만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질식한 아기를 인공호흡으로 살린 것이 그 사례이다. 또한 뱃속의 아이가 자연분만을 할 수 있도록 사전에 뱃속에서 조절을 해 주는 일도 그 일환이다. 그 덕으로 60여년 동안 받은 아이나 산모가 무사하였다고 본다.

 

3. 김연희 조산소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빛나는 조산일도 있지만, 그가 남긴 출산 기록물 때문이다. 조산소를 열었던 1954년 이후 1990년대까지 출산에 관한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사항은 출산연월일, 이름 및 주소, 연령, 조산료, 출산시간, 성별, 체중, 우수 등이었다.

 

현재 조산소를 운영한 이들 중에서 이와 같은 기록물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사실, 조산원이 거의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러한 기록물이 다시 생산될 가능성도 없다. 따라서 이 기록물은 조산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기록문화를 풍부하게 해줄 보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좋은 것은 그의 부군께서 남긴 각종 기록물 역시 양이나 내용에서 양질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농일지나 일기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활동 속에서 생산된 기록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 분들의 기록물은 당연히 컬렉션 수준으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출산된 사람들도 주변에서 보았다. 그들의 기억도 같이 묶어두면 더욱 좋을 것이다. ​

4.1960년대에 마산지역의 조산원은 대략 어떠한 상태였을까. 1963년 당시 마산지역 조산원의 위치와 대표자는 다음과 같다.

 

상호

대표자

소재지

전화번호

1

조산원

장영달

상남동 223

 

2

조산원

우금휘

중성동 126

33

3

조산원

김도선

두월동 14

993

4

조산원

박순복

오동동 141

886

5

조산원

김삼분

장군동 4253

973

6

조산원

주복선

중성동 99

1120

7

조산원

전주순

성호동 73

1519

8

조선원

유상례

교원동 69

 

9

조산원

이봉희

산호동 457

1580

10

조산원

강남숙

성호동 56

 

11

조산원

정경선

자산동 229

 

12

조산원

신덕수

남성동 64

72

13

조산원

김정득

오동동 135

1533

14

조산원

정경자

상남동 230

 

(마산상공회의소, <마산상공명감, 1963년도>, 270)

 

공식적으로 등록된 곳은 14개이다. 비공식적으로 산아를 받은 이들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적지 않았을 것이다. 주된 위치는 오동동, 남성동, 중성동, 성호동 등 대부분 원마산 일대이다. 4곳으로 가장 많다. 상남동, 교원동 등 북마산에 3곳, 자산동 중앙동 장군동 등 중앙 마산에 3곳, 신마산에는 두월동 한 곳이다. 당시에 도시화가 되어 있던 곳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산부인과는 구봉회(산부인과, 중앙동)외에 부인과로 등록된 곳이 김영수(수성동 81), 안재용(동성동 174), 김지영(동성동 177-5), 오세량(남성동 108), 김한동(동성동 177-6) 등이 있었다. 부인과에서 모두 임신과 관련된 문제를 담당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문적으로 산과를 다루는 병원으로 한정하면 중앙동의 구봉회씨 한 곳인 셈이다. 그만큼 산아를 다루는 병원이 적었으므로 조산사가 대부분 산아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