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산성은 영춘면 하리와 백자리 사이에 있는 성산(427m)에 있다. 이 성에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온달산성은 고구려가 신라군을 막기 위해 온달이 쌓아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는 석조산성이다. 옛 기록에는 이 성을 올아단성, 또는 아단성이라 했는데 ' 한강 상류의 골짜기 동네"란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호서읍지>에는 성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장수이다. 우리에게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온달 일대기 속에는 설화적인 색채가 강하게 들어 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장사를 하며 살던 온달이 평강공주를 만나 공부와 무예를 배워 경연대회에서 무사로 뽑혔다. 그 때 후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온달이 후주의 무제와 접전하여 종횡무진 활약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평강왕은 귀환한 군사들에게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이 자리에서 큰공을 세운 온달은 부마로 인정을 받는다.
한동안 평강공주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온달은 왕에게 나가 아래와 같이 고한다.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 땅을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온달은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영춘 하리에 진주하여 온달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무렵 힘이 약했던 신라.백제 두나라는 형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쪽 후주의 무제가 다시 쳐들어왔다. 고구려의 군사가 총출동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사이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 부근 땅을 차지해 버렸다. 온달은 산성을 쌓고서 전투를 시작했다. 신라군은 죽령을 넘어 떡가래 아래 본산골에서 2개조로 나누어 공격해 왔다. 신라군의 2진은 비로봉에서 형제봉.신선봉을 거쳐 남천성골을 공격해 왔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곶적령의 험준한 자연조건을 이용해 신라군을 무찌르고 온달산성의 북쪽을 지킬 수 있었다. 온달 장군은 황장군과 함께 처음에는 피알기(피화리)에서 진을 쳤으나 지형조건상 온달성 부근 대진목에서 진을 치게 된다. 신라 쪽에서는 경주와 가깝고 산을 조금 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는 먼 거리의 산악행군을 해야 했으므로 군사가 많이 지쳐 있었다. 대진목에서 두 나라 군사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고구려군은 면위실까지 밀리게 되고 온달은 신라군에게 포위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온달이 겨우 포위망을 뚫고 비마로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온달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돌아오겠다는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면위실로 건너가니 시체가 즐비하고 피가 흘러서 온통 피바다(피바위골)가 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대진목으로 왔으나 황장군은 이미 전사한 후였고, 군사는 모두 온달산성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도 온달은 힘을 내서 싸웠다. 군관에서는 초병으로부터 표대봉으로 깃발을 올려 수로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한편으로는 고드미재로 신라 기마병이 온다는 연락을 받게 된 온달은 은포동에 숨겨둔 돌포를 쏘았으나 두 번 이상 쓰지 못하고 점령당하자 온달산성에서 퇴각할 것을 명령한다. 군사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친 후라 강물을 건너다 여울에 넘어지고 자빠지며 물살에 마구 굴러 떠내려가고(망굴여울), 겨우 진영을 수습한 온달은 산능선 안전한 곳(아산동)으로 군사들을 집결시켜 쉬는 돌에서 휴식(휴석동)을 취하도록 했다.
뒤이어 온달은 산성으로 들어와 성벽의 돌을 뽑아 던지며 신라군과 싸움을 벌이지만 군사와 양곡의 부족으로 전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이 때 신라군이 쏜 화살에 가슴을 맞은 온달은 쓰러지고, 온달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부마이여 장군인 온달의 시신을 수습하여 입관하고 고구려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금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평강공주에게는 남편으로서의 떳떳함을 보이지 못했으니 어찌 온달산성을 훌쩍 떠날수 있었겠는가. 그러자 사람들은 평강공주를 불러 온달장군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온달산성 아래 도착한 평강공주가 온달의 관을 부여잡고 " 이제 죽고 사는 것이 결판났고, 서로 갈 길이 다른데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다"라고 말하자 관이 움직이고 장사를 지냈다.
전설이 사실과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라고는 해도, 그 속에는 당시 고구려 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흥미거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민이나 다름없는 평민의 신분에서 임금의 사위라는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고, 더없이 귀한 공주의 신분으로 바보같은 온달과 혼인을 한 평강이 남편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당시 신분구조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대 반영물 중에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형상화하여 이야기로 표현된 것이 전설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귀족세력이 중심을 이루던 지배체제에 천민이나 다름없는 평민의 신분으로 어떻게 최고의 지위에 올랐을까. 온달이 북주의 무제군을 요동에서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혔다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고 있겠지만, 그보다는 고구려 24대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갈등으로 고구려 지배질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부권중심의 사회 풍토에서 딸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다는 이야기나, 아내인 울보공주가 바보 온달인 남편을 가르쳐 출세를 시켰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동안 다듬어졌다고 하더라도 당시 기존질서의 허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민중의식과 여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를 개혁하려는 민중역사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본다.
온달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으로는 온달과 관련하여 많은 전설들과 지명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이곳이 신라와 고구려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온달산성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장군목.대진목.꼭두방터.중간방터.아래방터.자삽.성재고개.쇠골.은포동.고드미재.은익이.면위실.군관.망굴여울.말등.황장군묘.암쇄바위.쇠점붙이.표대봉.진잠.비마루.쉬는돌.윷판바위.조산데미.둔친머리.분산골.바른골.피바위골.피바위.쇄골목지.겟발치.통쉬골.돌무지골.안이골.장방터.배판골.성골.보수원.시봉터.초막골.무덤골.시봉쏘.태장골 등 많은 지명들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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