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있는 공간]/아름다운 주택들...

침대와 소파도 잘 어울리는 한옥

현정 (炫貞) 2007. 6. 2. 12:39
      침대와 소파도 잘 어울리는 한옥
 

 



‘정말로 감사하고, 부끄러우며, 또 자랑스러운….’ 외국인이 사는 한옥을 방문할 때면 늘 이 세 가지 감정을 나란히 앞세우게 된다. 우리 문화유산을 이렇듯 귀하게 대접해주고 인정해주니 정말 감사하고, 귀한 줄 알면서 그들보다 먼저 챙기지 못하니 부끄러우며, 이국인이 보기에도 훌륭한 문화유산을 지닌 민족임에 자랑스럽다. 북촌의 오르막길 맨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필리프 티로Philippe Tirault 씨 집을 방문할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와가 얹혀진 그의 집 대문 앞에 서자 ‘으흠’ 절로 목을 가다듬으며 그 세 가지 마음가짐을 추스르게 된다.


마루에서 안마당을 내다본 모습. 아랫집의 기와지붕 덕분에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다.

사각형의 돌 화단, 대찬 바람에도 오롯이 푸른 대나무, 올해로 수령 70년이 되었다는 소나무, 물확, 솟대, 맷돌을 듬성듬성 놓아 만든 징검다리….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만난 풍경에 대문 앞에서 가졌던 기대에 한 치의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다. 정통 흙마당은 아니지만 잔디가 깔린 아담한 안마당의 표정에서 우리네 정서가 유유자적하게 풍겨나고 있다. 겨울이 채 끝나지도 않았고, 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당에는 벌써부터 푸릇푸릇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남향이라 볕이 좋은 덕분이다. 게다가 ‘ㄷ’자형의 건물 앞을 앞집 담이 막고 있어 바람마저 쉬이 드나들지 못한다. “한옥에서 산다고 하면 으레 추운 겨울철 외풍 때문에 불편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첫 번째 질문이에요. 대답은 ‘전혀 아니다’입니다. 한옥이 어려운 시절과 결부되어 있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집의 경우 한옥의 정통 방식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현대식 설비를 갖추어 개조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에는 그 좋은 온돌 문화가 있잖아요. 흙과 나무가 주요 소재이기 때문에 한번 난방하면 열이 쉽게 식지 않아 오래도록 따뜻합니다.”

프랑스 은행의 직원으로 일하다가 한국에 들어온 지 올해로 20년째라는 필리프 티로 씨, 현재 미국계 헤드헌트 회사인 ‘콘페리 인터내셔널’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프랑스인이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등 아시아 여러 국가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산 곳은 한국뿐이다. 그동안 한남동 유엔 빌리지 안에 위치한 아파트에서도 살아보았고, 한옥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널찍한 성북동 빌라에서 4년 동안 생활하기도 했다. 아파트나 빌라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이곳 한옥으로 옮겨온 것은 지난해 6월. 한옥살이 겨우 1년이 되어가는 초보구나 싶었는데 한옥에 대한 관심과 한국 문화에 대한 안목을 확인하고 나니 한국 사람 못지않다. “1999년까지 법적으로 외국인은 한국 내에서 주택을 소유할 수 없었어요. 한옥에서 사는 것은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일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요.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살 집을 찬찬히 찾아보다가 북촌 오르막길 꼭대기에 있는 30평가량의 이 집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돌 물확, 솟대, 석탑, 대나무 등이 옹기종기 자리한 안마당과 마주한다. 집이 ㄷ자형 구조로 앉혀져 있어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구입 후 개조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구가건축(02-365-0390)에서 개조했는데, 북촌의 다른 한옥과 마찬가지로 마감재나 기둥 등이 워낙 낡고 오래된 탓에 쉬운 작업이 아니었단다. 새롭게 손을 본 굴뚝 외에는 외관의 전통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살렸고, 실내에는 입식 구조를 도입해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그제야 거실의 소파와 테이블, 침실의 침대와 벽난로, 주방의 식탁과 싱크대 등이 말 그대로 모두 입식이구나 싶다. 하얀색 회칠 사이로 가지런하게 드러나 있는 천장의 서까래, 공간을 가로지르는 대들보, 침실 앞에 나 있는 쪽마루와 불발기창…. 어느 곳을 둘러봐도 한옥 고유의 모습이 고스란히 살아 있어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이 접목된 공간이라는 티가 도드라지지 않는다.

“툇마루를 중심으로 안방이 있던 공간을 거실로, 건넌방이 있던 곳을 침실로 개조했어요. 퀸 사이즈의 침대를 놓기에 방 한 칸이 너무 작아서 방 두 개를 하나로 터서 침실로 만들었어요.” 좁고 기다란 침실 공간에 침대가 반듯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있다. 잠들기 전과 아침에 눈뜬 후, 천장의 서까래와 대들보를 올려다보는 것이 필리프 티로 씨가 한옥으로 이사 와서 누리는 최고의 낙. 침대에 누운 채 오른쪽에 나 있는 격자무늬살 창문을 열어젖히는 것은 또 어떤가. 동쪽의 환한 아침 햇살을 따라 시야에 들어오는 소담한 안마당, 그 건너편 주방의 나무 대문을 바라볼 때마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한옥의 면모에 감탄할 따름이다.


방 두칸을 터서 만든 침실, 잠들기 전 대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이렇게 개조하는 데 평당 1백50만 원 정도, 마당을 포함해 30평이니 총 4천5백만 원가량이 들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왜 좋은 집 놔두고 비싼 돈 들여 한옥에서 사냐’고 반문했단다. 말로 설명하기보다 이삿짐 정리가 끝난 뒤 한옥으로 초대를 했단다. 직접 둘러보면서 그 운치를 알아차렸는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친구가 근처에 한옥 한 채를 구입했을 정도다.

“한옥은 모든 방의 문을 열어젖히면 널찍한 하나의 공간이 됩니다. 열린 문을 통해 보이는 다른 방, 그 방 건너편의 또 다른 방… 이렇듯 입체적으로 포개진 듯한 공간 구성이 상당히 흥미롭고 신비롭게 여겨져요. 반대로 문을 닫아걸면 오직 나만을 위한 아늑한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그런 가변적인 성격이 좋아요.” 공간의 중첩이라…. 한옥의 이런 특성을 간파할 정도인 것을 보니 한국 문화에 대한 그의 안목이 분명 범상치 않다.

고려시대 찻잔과 사발, 조선시대 붓통 등 그가 수집해놓은 한국 골동품은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아니,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한국 앤티크를 수집하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 깊어졌고 자연스레 한국의 전통 주거공간인 한옥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금의 한옥살이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파리에 ‘민화’MINHWA(www.antikaparis.com/minhwa)라는 숍을 오픈, 도자기, 불상, 붓통, 소반 등 한국 골동품을 전문으로 판매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단순한 한국 마니아 그 이상이다. “한국의 문화유산은 어딘가 모르게 비어 보이고 부족해 보이죠. 덜 성숙된 듯한 느낌이랄까. 그 완벽하지 못한 모습에서 완벽함을 볼 수 있어요.


침대가 놓인 반대편의 안방 모습. 고목의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천장 아래. 서구식 변난로와 벽걸이형 텔레비전들이 함께 어우러져 색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마음을 깨끗하게 비운 듯한 소박하고도 진솔한 느낌. 찌그러져 있으면 애써 펼 생각을 하지 않고 찌그러진 모습 그대로, 한쪽이 기울어져 있으면 반듯하게 만들기보다 기울어진 대로, 그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훌륭하게 여겨집니다.” 한국 문화에, 우리 역사에 참 깊이도 들어와 있구나 싶다. 그것도 ‘제대로’ 말이다. 같은 아시아권이지만, 웅장하고 화려하고 힘차고 가득 차 있는 듯한 중국 문화나 아주 섬세하고 가늘고 정교한 일본 문화와는 전혀 다른 한국 문화의 차별성을 족집게로 집어내듯 짚어낸다. 갈라지면 갈라진 대로,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굴곡지면 굴곡진 대로 당연하다는 듯이 수용하는 한옥이라는 공간도 그런 미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한국 도자기에 관련된 책을 내기 위해 현재 집필 중이라고 하니 그의 안목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내년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백20주년이 되는 해. 이를 기념해 프랑스박물관 아시아 파트에서 한국 앤티크 도자기전을 크게 여는데, 그 행사를 위해서다. 한국 문화 홍보사절단을 자처해주니 이 또한 고마울밖에. “일전에 자동차가 우리집 벽면에 부딪혔나 봐요. 제가 출근하고 없어 집이 비어 있었는데, 이웃 주민들이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가 일처리를 도와준 적이 있어요. 사람 사는 곳답지 않나요?” 집을 나서면 마주치는 동네 이웃들이 건네는 ‘헬로’라는 말 한마디에 훈훈한 정이 마구 솟아난다는 그에게 ‘북촌 한옥’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