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1@행주산성에서 바라본 방화대교
강바람 따라 임진강에서 도피안사까지(1)
산과 들에 녹음이 짙어가고 있다.
라일락 꽃향기와 초록의 향연이 유혹한다.
현대인에게 휴테크는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 하지만 이럴 때 갈등이 생긴다.
어디로 갈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돌아올 일이 걱정이기 때문이다.
휴콕?
휴일 집에 콕 박혀 TV나 보고
부족한 수면 취하는 것도 휴식이라 하지만 왠지 허송하는 것 같다.
나서자.
강변북로를 탔다.
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히지 않은 코스를 택했다.
시원한 강바람이 싱그럽다.
서울시와 경기도를 가르는 시계(市界)를 벗어나자마자
왼쪽 한강변에 행주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토축산성이다.
조일전쟁 때 권율장군이 2,300여 군사를 가지고 3만여 왜군을 무찌른 전적지다.
@IMG2@행주산성에서 바라보면 북한산과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에 오르면 북한산과 남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아스라이 남한산성이 보인다.
군사 전략에 문외한이라도 전략요충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강에 걸친 다리 중에서 제일 긴 다리라는 영예를 안고 있는
방화대교의 아름다운 아치가 눈앞에 펼쳐진다.
도보 거리가 길고 볼 것이 많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에 별도로 시간을 내도 좋다.
자유로는 언제 달려도 자유스럽다.
90km/h 도로이지만 막힘이 없다. 일주일 내내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기분이다.
도로 이름을 명명할 때 북한을 의식해서 지었겠지만 누가 작명했는지 잘 지었다.
장항 IC를 지나자 강바람에 갯내음이 묻어온다.
밀물이나?
바다가 가깝다는 신호다.
@IMG3@반구정
일산대교를 지나 2차선으로 좁아지던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개성공단과 개성을 통한 육로관광을 염두에 두고 공사를 하는 모양이지만
예전에 중앙분리대 역할을 해주던 초록색 잔디가 좋았던 것 같다.
통일 전망대를 지나 신바람 나게 달렸다.
여기까지 달려온 것만으로도 오늘 나온 것의 절반은 성취한 것 같다.
당동IC에서 자유로를 벗어나 사목 삼거리에서 좌회전 했다. 반구정을 가기 위해서다.
강남에 압구정(狎鷗亭)이 있다면 임진강엔 반구정(伴鷗亭)이 있다.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가
87세에 영의정을 물러나 임진강 갈매기를 벗 삼아 만년을 보냈던 곳이다.
반구정에 오르는 길에 철조망이 손에 잡힐 듯하다. 분단의 아픔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IMG4@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민간인 통제 철책선
맑은 날이면 개성 송악산이 한눈에 보였던 반구정.
예전엔 강 건너 장단을 오가던 낙하 나루터가 있던 곳에 총을 든 병사가 서있다.
해주 구월산 장두목이 건넜던 나루터 이련만 흔적이 없다.
보부상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강 건너 장단은 언제 가보려나?
반구정을 나와 문산 전곡방면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5km정도 달리면 화석정이다.
율곡 이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고 공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화석정에 올라서니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초록으로 물든 산야가 싱그럽다. 참 좋은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는 느낌이다.
@IMG5@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
화석정은 율곡이 세운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 대석학 길재가 세운 것으로 전해져 온다.
쇠락한 화석정을 율곡의 5대 할아버지가 다시 세웠다.
10만 양병설을 주창하던 율곡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임금이
도성을 함락한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난(몽진)길에 나서 이곳에 당도했지만 날이 저물었다.
추격하는 왜군이 벽제까지 왔다니 날이 어둡다고 지체할 수 없었다.
화석정을 불태워 불을 밝히고 강을 건넜다
그후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다시 세웠다.
이때 붙인 것이 박정희 글씨 현판이다. 씁쓸하다.
율곡의 어린 시절을 지켜봤을 450년 생 느트나무를 뒤로하고 화석정을 나서 좌회전 했다.
310번 도로를 따라가다 좌회전하면 자운서원이다. 율곡 이이와 신사임을 모신 곳이다.
@IMG6@화석정
우리가 신사임당과 율곡을 생각하면 강릉 오죽헌을 떠올리는데
율곡(栗谷)이라는 호가 말해주듯이 강릉은 율곡의 외가이고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가 본향이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가 과거공부 하던 시절,
율곡을 임신한 신사임당이 친정에서 첫 아이를 낳았는데
그곳이 강릉 오죽헌이고 몽룡실이다.
율곡과 사임당의 묘를 살펴보면 그 시대 여자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영원한 어머니 상으로 사임당을 존경하는데
묘는 한쪽 자리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잘 가꾸어진 자운서원을 빠져나와 310번 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문산에서 오는 37번 도로와 마주친다.
식현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조금 달리다보면 적성 시가지가 보인다.
@IMG7@자운서원에 있는 신사임당 묘
버스 터미널 직전에서 좌회전 한다. 경순왕릉으로 가기 위해서다.
천년 신라을 마감하는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간통제선 구역에 포함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자유롭지 못하던 곳이다.
이제 남북 화해무드를 타고 민통선이 후방으로 물러나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민간인 통제선 바로 직전에서 우회전하는 곳이 고랑포다.
조선시대 서해바다에서 임진강을 따라 거슬러오는 수상운송의 중요 거점이다.
소금배가 닻을 내리고 내륙 물산의 집하장이었다.
한국전쟁 휴전 무렵,
이곳을 내주면 개성 후방을 터주는 꼴이 되어 북한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곳이다.
북한군은 패퇴했지만 개성은 우리 수중에 들어오지 못했다.
철원 평강 김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와 더불어 격전지 중의 하나이다.
@IMG8@지뢰 표지판
능상으로 가는 길목 여기저기에 <지뢰>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바로 이곳이 아직도 한반도의 냉기류가 흐르는 곳이고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이 경순왕릉임을 표시하는 비석에도 탄흔이 수없이 많다.
한국전쟁 당시 피아간에 희생이 많았던 곳이다.
조국(?)을 위하여 산화한 젊은 넋이련가?
이름 모를 야생화가 외로이 피어있다.
경순왕 사후 고려 5백년과 조선 중엽까지 산야에 묻혀 있던 경순왕릉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조선 영조 때이다.
그래서 묘제나 석물이 조선 후기 양식이다.
신라가 패망한 이후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으로부터 정승공에 봉해지고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은 경순왕이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잠들어 있는지 밝혀진바 없다.
@IMG9@경순왕 비석
경순왕은 자신의 도읍지 경주를 벗어나 경기도 연천 땅 이곳에 묻혀있고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조국의 패망을 통한으로 받아들이며
이곳에서 가까운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에 들어가 삼베로 옷을 해 입고 살며
생을 마감했다.
경순왕릉을 바라보노라면 신라 천년의 영화와 오욕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한반도를 통일했던 신라.
그 신라의 마지막 왕이 한반도의 등허리에 묻혀있다.
망국의 한이 가슴에 저며 오지만 한반도의 통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덧붙이는 글
제목에 나와 있는 도피안사는 가보지도 못하고 다음 편으로 넘어갑니다.
2편에는 어수정과 숭의전,
그리고 휴전선 철책선 노동당사와 도피안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제되었습니다*
출처 : | 삿가스 칼럼 | 글쓴이 : 삿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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