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동란(6.25 전쟁)-
우리들의 自畵像
육.이오 한국동란이 발발한지 어언 59년
두번다시 기억하기도 싫지만,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불과 반세기전 우리의 自畵像이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피비린내는 살육의 현장들이
그 때는,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처참한 몰골로 야생초처럼 끈질게 견뎌온 모진 생명들이...
다시는 어런 곤욕을 치르지않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불과 반세기만에 경제대국 10 위권에드는 경제발전을 하였고
국민소득 2 만불시대를 이루어 한강의기적과 전국을 고속도로화하여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현재와 같은 번영을 누리는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6. 25. 전쟁이 끝난지 60 년이지난 현재의 우리 젊은이들이여,,,
아래 사진들은 다른 아프리카나 미개한 나라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이였음을 상기하고 더욱 노력해서 일류 선진국 반열에 이룩해야 하지않을까,,,
불과 반세기가 흐른 지금,우리는 너무 빨리 이 아프고도 소중한
기억들을 까맣게 망각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사진들은 알바니아 태생으로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한국전쟁을 취재한 미국의 저명한 사진가 디미트리 보리아가 駐日 美극동사령부 사진반에서 일할때
각지를 돌며 촬영한 것이다.
전쟁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한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손바닥을 벌려야 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산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 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면 땔감일까 ?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군사독재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하여
"의지의 한국인"을 세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 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이 민족의 처절한 단면이다.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이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
개털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부분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좋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에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연을 들고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傷痕(상흔)을 잠시 잊은듯 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아이가 탈진 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마치 요즘 북한 장마당의 꽃제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 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배대를 고개를 외로 꺽고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이 손에 쥔 깡통 속을 바라보는 노인.
전쟁은 노인의 빈 담배대와 소년의 빈 깡통 속에 있었다.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구를 싣고수백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길가에 앉아 참외 등을 팔고 있는 아낙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래야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더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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