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과 여행]/세계의 명소

[스크랩] [중국/실크로드]‘그저 가고 또 가고 눈만 뜨면 가는 게 이번 여행’

현정 (炫貞) 2007. 4. 24. 09:54

 

 

[중국 실크로드(상)]

 

사막길에 남아 있는 천 년 역사를 찾아서

난주~가욕관~돈황~투루판~우루무치~카시 구간

 

▲ 사막에 솟은 명사산의 오아시스 월아천. 수천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실크로드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인 F. 리히트호펜이란 사람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운반된 물품이 주로 비단인 것에 착안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크로드에는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가는 천산북로와 남쪽으로 가는 천산남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으로 가는 서역남로가 있다는데, 우리는 천산남로로 카스까지 갔다가 서역남로로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비단이 뭐길래 그 고생을 했을까   

10월13일(목) 맑음. 베이징~난주. 아침 9시4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만에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베이징 공항에서 점심식사를 하려니 물을 주지 않는다. “아니 물도 안 주는 식당이 어디 있냐?”고 불평들을 하니 베이징 공항은 물가가 비싸 물 한 병에 4,000원이나 한단다. 인솔자 김 사장이 물보다 맥주가 더 싸니 맥주로 먹자고 하여 물 대신 맥주로 갈증을 달랬다.

▲ 만리장성의 서단인 가욕관의 현벽장성.
오후 3시 다시 중국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난주로 향했다. 이코노믹 좌석이 꽉 찼는지 대장과 임경희씨는 비즈니스석에 앉아서 가셨다. 하여튼 복 많은 사람은 자빠져도 머리도 안 깨진다. 난주로 가는 길은 그저 황량한 산과 사막의 연속이다. 저렇게 황량하니 흙먼지가 날려 우리나라까지 황사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싶고, 저기에 인간의 힘으로 나무 몇 그루 심은들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다.

난주에 도착하니 전체 가이드 김창묵씨와 난주 가이드 허동식씨가 우리를 맞이한다. 시간이 늦어 부지런히 백탑사(百塔寺)를 보러 갔다. 막 문을 닫으려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어두컴컴한 백탑사로 올라갔다. 백탑사 꼭대기에 올라가니 7층 높이의 하얀 탑이 서 있고, 발 아래로는 어두운 황하에 밝은 조명으로 모양 낸 황하대철교가 걸려 있다. 허동식씨는 우리들이 밤에 황하를 보게 되어 흙탕물이 잘 안 보이니 다행이라고 했다.

▲ 가욕관 박물관.
어두운 백탑사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오니 아뿔싸 문이 잠겨 나갈 수가 없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담이 사람 키 세 배는 되어 뛰어내릴 수도 없다. 돈 받고 넣어줄 때는 언제고, 나가지도 않았는데 문을 잠그는 법이 어디 있나. 기가 차서 마냥 서 있는데 가이드가 관리실에 찾아가 이야기하니 다른 쪽 출구로 나가는 문을 열어준다.

부지런히 나와 이번에는 황하모친상(黃河母親像)을 보러 갔다. 중국에서는 황하를 어머니로 보고 중국 사람들은 모두 황하의 자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황하모친상은 누런 조명을 받고 누워 있는 여인의 곁에 아기가 엎드려 있었는데,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본 중국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 카사의 위구르족 여인들.
저녁 식사 후 난주역으로 가서 가욕관행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4인 1실의 2층 침대차였다. 임양숙씨와 나는 밑의 층에 눕고 날쌘돌이 조수경씨와 조연옥씨가 2층으로 올라갔다. 덜거덕거리는 열차에 누워 있다 보니 요람에 누운 어린 아기 같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10월14일 맑음. 가욕관. 아침 8시쯤 가욕관역에 내려 인원을 점검하니 4명이 없다. 먼저 나갔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나가려는데 김 사장이 역무원에게 부탁해 떠나려는 열차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서야 정원식, 임경희, 우정복, 윤영자씨가 짐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마 내리라는 소리를 못 들은 모양이다. 우리는 아찔한 순간을 모면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위진벽화묘(魏晋壁畵墓)를 보러갔다.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돌무더기에 불과했으나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니 부부합장묘 안쪽 벽에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벽돌 하나하나에 소, 멧돼지, 닭 등을 잡는 모습도 있고, 요리하는 모습, 뽕나무의 새를 쫓는 모습 등 일상생활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몇 백 년을 지난 그림 같지 않게 선명한 색깔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 투루판시장의 건포도 선별작업.
다음에는 가욕관성(嘉欲關城)을 보러 갔다. 여러 개의 성루와 망루가 잘 보존되어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관아 건물에는 작전지시를 하는 장군의 모습, 졸고 앉아 있는 관리의 모습, 몸단장을 하는 여인의 모습 등을 만들어 그 때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욕관성에서 나와 현벽장성(懸壁長城)이라고도 하고, 단벽장성이라고도 하는 만리장성 끝자락을 보러갔다. 갈 길이 머니 조금만 올라갔다가 돌아오라는 것을 30분만에 정상의 성루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정말 빠르다며 가이드가 혀를 내둘렀다.

가욕관 관광을 마치고 오후 3시가 넘어 돈황으로 출발했다. 돈황까지는 포장도 안 된 고비사막의 흙먼지 길을 하염없이 달렸다. 무슨 화물차들은 그리도 많은지 이 육중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나 10m 앞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실크로드는 옛날에만 물류의 중심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길을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며 9시간 이상 달리려니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뻐개지는 것 같다. 길에는 당연히 화장실도 없어 수시로 노상방뇨를 일삼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차 타고 가기도 이렇게 힘든데, 이런 길을 몇 달씩이나 낙타 타고 다녔을 옛 상인들을 생각하니 비단이 뭐길래 그 고생을 했을까 싶다. 실크로드는 비단결같이 아름다울 줄 알았더니 아주 사람을 잡는 길이었다. 그래도 가는 도중 이종성님이 고비사막 노래를 불러 피곤에 지친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됐다.

▲ 필자 이현숙씨.
날이 어두워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돈황국제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다 됐다. 돈황국제호텔은 별이 세 개라는데 어찌나 추운지 이게 별 세 개면 열차는 별 다섯 개짜리라고 툴툴대며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는 잔뜩 웅크리고 고양이 잠을 잤다.

10월15일(토) 맑음, 돈황.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날을 새우고 아침 일찍 명사산으로 향했다. 명사산(鳴沙山)이란 모래로 된 산인데, 밟으면 모래의 마찰로 소리가 난다고 한다. 난생 처음 낙타를 타려니 좀 겁이 났지만 남들도 다 타는데 못 타랴 싶어 안장 앞의 손잡이를 잔뜩 부여잡고 낙타 등에 오르니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앞뒤로 까불더니 낙타가 일어섰다.

일단 일어서니 별 어려움 없이 명사산 밑에 도달해 거기서부터는 계단으로 올라갈 사람은 20원을 내고 올라가 썰매로 내려오고, 걸어 올라갈 사람은 모래산을 그냥 올라갔는데 한 발짝 올라가면 두 발짝 미끄러지니 할 수 없이 손가락을 모래에 꽂으며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아직 햇볕을 받지 않은 모래는 어찌나 차가운지 장갑을 끼어도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미끄러지며 고꾸라지며 능선 부근까지 오르니 난생 처음 보는 모래언덕이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 투르판의 우구르족 소녀들.
능선길을 걷다가 대장님을 따라 모래언덕을 뛰어내려왔는데 그게 또 기가 막히게 스릴이 있었다. 반쯤 내려와 썰매 타는 곳에 와서 대장님의 탁월한 능력 발휘로 5원씩에 썰매를 타고 눈썰매보다 더 빠르게 내려왔다. 명사산 아래쪽에는 월아천(月牙泉)이라는 작은 오아시스가 있고, 초생달 모양의 호수 주위로 나무도 있고 멋진 집도 있었다. 이 호수는 모래산에 둘러싸여 수천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 신비한 샘이다.

월아천에서 낙타를 타고 다시 나와 호텔에 와서 샤워하고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우정복님이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대장님과 김사장님은 얼굴이 일시에 사색으로 변하고 회원들에게도 먹구름이 내렸다. 명사산에서 내려와 사진을 찾을 때 많은 중국인들과 섞이면서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대장님은 명사산 관리소에 전화를 하여 한국 여권 주운 사람이 있으면 특별히 사례하겠다고 연락하고, 돈황 박물관을 보러 갔는데 우정복님과 김사장은 둘이서 대사관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리는 우정복님을 보는 회원들은 여기서 아주 이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 투르판의 화염산을 낙타로 오르고 있다.

 

 

사막 사람들에게는 물 위 세상이 극락세계

돈황 박물관에 도착하여 보는 둥 마는 둥하고는 막고굴(莫高窟)로 향했다. 막고굴은 TV에서 본 적이 있는 수많은 동굴로, 굴마다 부처님과 벽화들로 가득했다. 이 굴들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스님들이 무사귀환을 빌며 굴을 파고 그 속에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4세기에서 13세기까지 근 천 년간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492개의 굴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벽화에 그려진 극락세계가 물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물 때문에 고생하던 사람들이 생각한 극락은 물 위에서 마음껏 물 마시고 물을 물 쓰듯 하며 사는 세상이었나 보다. 특히 17굴에는 대량의 불경과 도경, 비단 그림, 수공예미술품 등 4세기에서 14세기까지의 문화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도굴꾼들이 자기 나라로 반출해 가면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들어 있었다는데, 프랑스인 페리오가 프랑스로 가져가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 명사상의 월아천.

 

이렇게 불상과 벽화를 보고 있는데 우정복님과 김 사장님이 돌아왔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대사관 직원이 다시 나와 임시통행증을 발급해줘 같이 관광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우정복님을 다시 만난 우리들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온 듯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막고굴 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한 후 유원역으로 이동해 투루판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오늘은 5성급 호텔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다고 기뻐하며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출발한 후 조금 갔는데 대장님이 우정복님 여권을 찾았다고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다니셨다. 어디서 찾았나 했더니 우정복님 트렁크 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해프닝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하며 덕분에 여권 단속 확실하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마음 편히 자리에 누웠다.

10월16일, 투루판. 아침 5시 반쯤 투루판역에 내린 우리는 머릿수를 몇 번씩 세어본 후 30명이 무사히 내린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식사를 하고는 고창(高昌) 고성으로 이동, 당나귀차를 타고 성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고창고성은 고대 고창국의 성터인데,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13세기경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진 성벽과 불탑이 겨우 남아 있을 정도였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 그 때의 번성을 짐작케 할 뿐이다. 남아 있는 성벽을 바라보니 이곳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그 때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지금과 같이 생을 고민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았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이라도 그 때의 사람이 벽 뒤에서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난주의 황하 모친상.

고창고성에서 나와 아스타나 고분을 보러 갔는데,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란다. 여기에는 귀족의 묘, 상인의 묘, 평민의 묘가 있었는데, 평민인 부부 묘에는 부부의 미라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남자는 40대에 폐결핵으로 숨졌고, 여자는 70대에 숨졌다는데, 어떻게 폐결핵이란 것까지 알아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다음은 화염산 북쪽 강 절벽에 있는 천불동으로 갔다. 83개의 동굴이 있었다는데, 현재 57개만 남아 있었다. 동굴 속에는 역시 불상과 벽화들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불교를 우상으로 생각하던 이슬람교도의 진입으로 많이 훼손되고, 근세에 와서는 러시아, 독일, 영국사람 등의 도굴로 많은 불상과 벽화가 해외로 반출되고 대신 사진만 걸어놓은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굴을 보고 나서 뒤의 타는 듯한 화염산(火焰山)을 보자 대장님이 충동심이 발동하여 가이드에게 1시간만 달라고 했다. 산을 오를 사람은 올라가고 낙타를 탈 사람은 타고 희망대로 하라고 하여 대장님과 정원식님, 이포규님, 안순자님, 나, 임양숙씨 이렇게 여섯 명이 붉은 흙과 모래로 된 화염산으로 기어올랐다.

보기에는 30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첫 번째 봉우리에 오르니 또 봉우리가 나타나고, 저기가 끝인가 하면 또 봉우리가 나타났다. 풀 한 포기 없는 능선을 걸으며 양옆을 바라보니 한쪽은 강이요 한쪽은 빙하가 쓸고 간 듯한 거대한 모래 협곡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길을 가노라니 이 길을 따라가면 이대로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 돈황 막고굴 입구. 근 천년간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492개의 굴이 남아 있다.

화염산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가 지나간 곳인데, 서유기에서 우마왕의 집이기도 했단다. 화염산은 이름 그대로 생긴 것도 불꽃 모양이고, 색깔도 불꽃 색깔이고, 여름에는 55℃까지 올라가는 불의 산이란다. 정상에서 깃발까지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는 다시 내려오는데, 대장님은 오른쪽 모래 계곡으로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시고 여자들은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다들 달려 내려가고 무릎과 발가락이 시원찮은 나는 제일 뒤에서 천천히 내려오는데 임양숙씨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천천히 보조를 맞춰 주었다.

화염산에서 내려와 교하고성(交河古城)으로 향했다. 교하고성은 두 개의 하천이 교차하는 곳에 있었다. 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번성했다가 멸망한 교하국의 성이란다. 교하고성은 두 하천 사이로 치솟은 30m 벼랑을 위에서 아래로 파들어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벽에는 지층이 그대로 남아 있고, 벽돌로 쌓은 고창고성처럼 허물어지지 않아 많은 건축물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번성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이토록 폐허로 변했는데, 중국 귀퉁이에 코딱지만 하게 붙어 있는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것은 생각할수록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인생무상, 나라무상이란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 가욕관의 `찬하웅광` 앞.

고성을 돌아 다시 나오는데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기에 웬 일인가 했더니 영화촬영 중이란다. 무슨 영화인지 몰라도 나중에 혹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꼭 봤으면 좋겠다.

교하고성에서 나와 카레즈(Karez)를 보러갔다.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빙하 녹은 물을 끌어들여 만든 수로다. 땅 밑에 수로를 만들고 거기까지 우물을 파서 나무도 심고 식수로도 활용하게 되어 있었다. 카레즈에 이어 찾은 소공탑(蘇公塔)은 신강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했다. 회교사원 탑이었는데 여자들은 사원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조금 나아져서 벽쪽에 있는 방 같은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제 날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야 관광을 끝내고 밥을 주는 것이 우리 대장님의 철칙이라면 철칙이다. 밥은 굶어도 볼 것 안 보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니 덕분에 우리는 구경 하나는 확실하게 한다. 저녁식사 때 본 위구르 민속 쇼는 규모는 작았지만 정감이 가는 쇼였고, 끝판에는 박남철님, 이인섭님, 김영자님, 장계희씨까지 끌어내어 한바탕 몰아쳤다. 쇼 뒤를 이은 노래자랑에는 일중의 명가수가 총출동했다. 이순정님을 시작으로 김숙옥, 윤영자, 이정자님 등이 나와 노래했고, 이정자님이 노래할 때는 남편 되는 이인섭님이 같이 나와 덩실덩실 춤까지 추어 웃음바다가 됐다. 보통은 부창부수(夫唱婦隨)인데, 이분들은 婦唱夫隨였다. 하여튼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팀이다.

 

 

새벽별 보기 운동으로 시작되는 답사여행

▲ 투르판의 화염산 낙타투어. 절벽을 이룬 북쪽 강기슭(천불동)에도 불상과 벽화가 있는 동굴들이 있다.

10월17일, 우루무치. 아침에 일어나니 이 날도 양숙씨가 토마토 주스를 마시라고 준다. 매일 주스에 과자에 다시마에 대추에 해바라기씨에 껌까지 얻어먹으니 미안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부실한 줄 알고 대장님이 항상 짭짤한 룸메이트를 짝지어주시니 해외만 나가면 호강이다. 난생 처음 오만 가지 음식이 다 들어오니 내 위장이 엄청 감동 먹었을 거다.

아직 먼동도 트지 않은 깜깜한 새벽에 아침식사를 하러 옆 건물로 가는데 오리온좌가 떠 있었다. 대장님에게 저 사각형의 별 속에 삼태성이 나란히 있는 것이 오리온자리라고 일러드렸더니 오리온 말만 들었지 처음 알았다고 기뻐하신다. 중학교 과학선생을 32년 했더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뻑하면 나서게 된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곳곳에서 어젯밤 11시 반이나 되어 마사지 받으라고 전화 와서 잠들을 못 잤다고 아우성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남자들이 있는 방에만 전화가 왔다. 그런데 정원식님 방에도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아마 정원식이 남자인 줄 알았나 보다. 그리고 안순자님 방에는 남자가 있는데도 전화가 안 왔다는 것이다. 남편 이름이 최영주라서 여자인 줄 안 모양이다. 하여튼 이름 하나는 잘 지어야겠다.

이 날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우루무치로 출발했다. 우루무치는 몽고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이란다. 가는 길에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풍력발전소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바람이 약해 풍차가 돌지 않았다.

우루무치 조금 못 가서 들른 남산목장에서는 말을 탔다. 옥룡설산이나 천호산의 조랑말은 작아서 겁이 안 났는데, 여기 말들은 다 컸다.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자기 말을 타라고 하기에 따라가 보니 백말이었다. 백말을 타고 보니 백마 탄 기사가 된 듯 기분이 우쭐우쭐했다. 생각할수록 이현숙 정말 출세했다. 처음에는 45분을 태워준다고 하더니 타는 시늉만 내고 20분만에 내리라고 한다. 김창묵씨가 항의하여 더 탈 사람은 다른 쪽으로 더 돌았는데 우리가 말고삐를 가이드 앞에 놓으면 고삐 임자에게 돈을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 아줌마들이 고삐를 마구 갖다 놓는 바람에 인원이 30명인데 고삐는 40개가 됐다.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데 정말 치열한 생존경쟁을 실감케 했다.

▲ 천불동 낙타투어의 주인공 쌍봉낙타.

우루무치에 도착해 홍산(紅山)공원에 올라갔다. 정상에 빨간 벽돌로 된 탑이 있었다. 진룡탑(鎭龍塔)이다. 옛날 이 지방에 홍수가 자주 나서 피해가 컸는데, 한 관리가 낮잠을 자던 중 꾼 꿈에서 도사가 나타나 홍수가 나는 것은 용의 조화이니 홍산과 그 옆의 야마리크산 사이에 탑을 세워 용을 진정시키면 홍수를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이 탑을 세웠더니 그 후로 비가 잘 안 온다고 한다.

홍산공원에서 나와 천산 천지(天山 天池)를 보러갔다. 천지는 백두산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천지가 있는 모양이다. 원래는 천지 밑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관광객이 많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하이브리드카를 타고 올라갔다.

천지에 도달하니 맑고 푸른 물 위에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이 비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유람선을 타고 천지를 한 바퀴 돌았는데 호 선생은 여기 찍으랴 저기 찍으랴 이 사람 찍어주랴 저 사람 찍어주랴 정신이 없다. 카메라도 좋고 ‘찍사’도 좋아 사진이 기막히게 나오니 너도나도 찍어달라고 야단이다. 한 번 여행 갔다 오면 사진 값만 100만 원 넘게 나온다는데, 매번 공짜로 주니 언제나 이 신세를 다 갚으려나 모르겠다. 그저 하시는 사업이 잘 되어 앞으로도 계속 같이 다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천지에 정신이 팔려 있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려 했다. 위구르 박물관이 문 닫을지도 모른다고 허둥지둥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는데 하도 차가 막혀 꼼짝하지 않는다. 걷는 게 더 빠르겠다며 버스에서 내려 부지런히 걸어가니 막 문을 닫으려고 한다. 사정해서 들어가니 불까지 다 끄고 문도 잠갔다가 다시 불을 켜고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박물관 속에는 여러 민족의 고유의상, 그림, 생활용품들이 있었는데, 다리미는 옛날 우리나라에서 숯을 넣어 쓰던 것 하고 똑같이 생겼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아기 요람이었는데, 요람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기들 오줌 받아내는 구멍이란다. 누워 있는 아기 고추에 ㄱ자 형태의 나무대롱을 끼워 밑으로 내려가게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저귀를 채우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 것 다 보고 저녁에는 또 민속쇼를 보며 식사하는 곳에 갔는데, 안순자님 내외가 거금 300달러를 내어 한 턱 쐈다. 쇼도 화려하고 음식도 푸짐했는데 신나게 먹다보니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화장실 표시가 없어 일하는 아줌마에게 토일릿이라고 해도 모르고 더블유씨라고 해도 몰라서 할 수 없이 쉬이~ 했더니 단박 알아듣고 저쪽으로 가라고 가르쳐준다. 하여간 어줍잖은 영어보다는 바디랭귀지가 최고다.

10월18일, 카시. 새벽같이 일어나 공항으로 이동해 카시로 향했다. 카시의 원래 이름은 카슈가르. ‘옥석 같은 땅’이란다. 이번 여행은 연일 새벽별 보기 운동이었다. 별 보고 출발하여 별 보고 호텔에 들어오니 북한의 새벽별 보기 운동보다 더 하드 트레이닝이다. 인도에서 귀국하던 당나라 현장법사도 이곳에 들렀는데, 그 때도 꽃과 과일이 풍성했다고 한다.

▲ 우루무치 민속쇼에서 노래를 부르는 현지인.
실크로드는 이곳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다. 천산산맥의 북쪽을 지나는 천산북로, 천산남로,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을 지나는 서역남로가 그것들이다. 그래서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컸는데, 기본 70%는 깎아야한다고 한다.

카시공항에 내리니 오전 8시 반이 되었는데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중국은 전체가 북경을 표준시로 잡기 때문이란다. 대장님이 주신 지도를 보니 카시가 북위 39도쯤 됐다. 우리나라도 38도선 부근이니 위도는 비슷한데 북경과의 경도차 때문인 것 같다. 북경은 동경 약 115도이고, 카시는 동경 75도밖에 안 되니 40도 차이면 1시간에 지구가 15도 자전하니까 약 2.7시간이 늦는 셈이다. 그러니 신강자치구 시간으로는 6시도 안 된 것이다.

공항에서 곧 바로 아이티카 청진사(淸眞寺·이슬람 신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보러갔다. 청진사는 신강자치구에서 가장 큰 청진사라고 했는데, 들어갈 때는 여자 남자가 팔짱을 낀다거나 짧은 팔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하기는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이라 길거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뒤집어쓰고 다니는 여자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얼굴까지 시커먼 머플러를 썼는데 어떻게 앞이 보이는지 잘도 걸어 다녔다.

신을 벗고 청진사 안에 들어가니 예배시간이 아니어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벽에는 현재 시각을 알리는 시계와 예배시간을 알리는 6개 시계가 걸려 있고, 예배를 주관하는 아홍(위구르족 이슬람 승려)이 앉는 의자와 큰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이 카펫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물건이라 했다.

사원에서 나와 화장실에 가려고 ‘WC’라고 쓴 곳으로 갔더니 한 남자가 못 들어가게 한다. 여자 화장실은 아예 없고 남자 화장실만 있는데 그것도 돈을 내야한다기에 대장님도 그냥 돌아오셨다. 속으로 ‘에라이~, 여기 아니면 화장실 없냐?’ 하며 돌아나왔다. 하여튼 회교국에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청진사에서 나와 위구르 시장 거리를 구경했다. 푸줏간에, 대장간에, 과일가게 등등 우리나라 옛날 장터 같았다. 포도가 어찌나 싼지 1kg에 2원(우리 돈으로 280원)이었다. 우리는 포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 카시의 향비묘. 북경서 자살한 시신을 3년 반에 걸쳐 운구해 봉안한 묘다.

베이징서 자살한 향비의 시신 3년 반 걸려 운구

시장 구경을 마치고 향비(香妃)묘로 향했다. 향비는 카시 여자로서, 이 지역 귀족의 딸이었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 때 한 장군이 카시를 점령하면서 황제에게 선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에 향비는 정혼한 사람이 있어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황제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황태후가 그녀를 불러 소원을 묻자 죽는 것뿐이라고 말하자 별실에서 자살케 했다고 한다. 그녀의 몸에서는 항상 향긋한 냄새가 나서 향비라고 했다는데, 그녀의 죽음을 안 카시 사람 124명이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베이징에서 시신을 운구한 다음 이곳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향비묘로 들어가니 마치 인도의 타지마할을 보는 듯했다. 생긴 모양도 비슷하고 왕비묘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다 똑 같은데, 어떤 사람은 쓰레기처럼 땅에 묻히고 어떤 사람은 온갖 장식으로 뒤덮인 건물 속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록 뭇 세인의 애도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향비묘에서 나와 1인당 30위엔씩 내고 고택민가를 보러갔다. 2000년 전부터 위구르인들이 거주하며 여러 가지 수공예품을 만들었다는데, 현재의 집들은 400~500년 된 집이라고 했다. 이 집 저 집 들어가 봤는데 마침 아기 젖 먹이는 여자도 있고 대문에 걸터앉아 모자를 만드는 여자도 있었다. 한 집에 들어가니 어제 박물관에서 본 것과 같은 요람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도 있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가 구경하는 것이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투르판의 고창고성. 13세기 이슬람국의 침입을 받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택민가에서 나와 찾은 바자르는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과 흡사했다. 그런데 한 아홍이 흰 터번을 두르고 어떤 여자를 끈으로 묶어 끌고 다니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곤 했다. 여자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반항도 안 하고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회원들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여러 가지를 샀는데 다들 깎는 데 도사가 됐다. 180원인가 하는 스카프를 30원에 달라고 떼를 쓰니 안 된다고 그냥 가라고 마구 손짓을 한다. 그냥 가려고 하니 “last price! last price!” 하며 35원 내란다. 그래도 안 사고 가는 시늉을 하니 붙잡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은 안 되나 보다고 다시 가서 아홉 개씩 열 개씩 사가지고 버스로 돌아왔다. 기막힌 신경전인데, 신경전에서 지면 바가지를 쓰게 되어 있다.

바자르에서 나와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 먹고 나오는데 어떤 중국 여자가 우리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KOREA’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통 모르겠다. 가이드 김창묵씨에게 물으니 자기가 TV 드라마 대장금을 보는데 너무 재미있고 한국 사람들이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도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한국의 위상을 엄청 높인다는 생각이 들고 공해 없는 이런 사업으로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 오늘이 남편 생일이란 생각이 들어 전화를 하려니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비즈니스룸에 들어가 무조건 “telephone” 했더니 전화기를 가리키며 쓰라고 한다. 남편에게 아침에 뭐 좀 드셨냐고 했더니 아들 며느리가 아침밥을 해 와서 잘 얻어먹었단다. 그 소리를 들으니 조금 덜 미안했다. 남편 생일도 안 챙겨주고 뭘 보겠다고 이러고 다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갈수록 자연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 모습이 갈수록 추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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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실크로드(하)]

 

 ‘그저 가고 또 가고 눈만 뜨면 가는 게 이번 여행’

카시~카라쿨 호수~허텐~우루무치 간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 횡단

▲ 파미르 고원의 양떼와 목동.

10월19일(수) 맑음, 카라쿨 호수. 아침 6시에 모닝콜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6시 반이나 되어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비몽사몽간에 "Hello! This is morning call"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늦게 울려 당황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 시간으로는 새벽 3시밖에 안 되니 미안한 생각에 “Thank you" 하고 끊고는 부리나케 준비를 했다.

먼저 내려간 강응상 선생이 식당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도로 올라오신다. 양숙씨와 내려오며 로비에 가서 물어보자고 한다. 직원에게 ”Where is restaurant?" 했더니 2층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2층에 올라가니 사방이 깜깜하고 불 켜진 곳이 없다. 한쪽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나오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한 남자가 한창 지지고 볶고 하느라고 사람이 들어온 줄도 모른다.

다시 나와 테이블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한 여직원이 와서 불도 켜고 준비를 해준다. 오전 8시 출발이라고 하여 부리나케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로비로 나오니 버스가 오지 않는다. 길이 좁아 작은 차 두 대로 가기로 했는데 한 대만 와 있다. 여권에 파란 딱지 붙은 사람들은 차에 오르고 빨간 딱지 붙은 우리들은 다시 로비로 들어오니 김 사장이 버스가 오다가 고장이 났다며 30분이면 온다고 했다. 결국 오전 8시50분이나 되어 출발했다.

위풍당당한 순백의 설산 무즈타그아타

카라쿨 호수까지는 왕복 10시간이 걸린다. 그나마 중국과 파키스탄을 잇는 카라코룸 하이웨이가 개통된 덕분에 가능해졌고 한다. 도로 가에는 백양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미루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줄기가 하얀 게 자작나무 같고, 잎은 단풍나무처럼 갈라져 있다. 이 백양나무는 여기뿐 아니라 신장자치구 전체에 늘어서 있었는데, 금방 목욕하고 나온 여인의 살결 같이 눈부시도록 흰 줄기가 인상적이다.

▲ 카시에서 허텐으로 가는 포장도로. 이동거리는 540km다.


가는 길에 지루하다고 김창묵씨가 노래를 불러준다. 예술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목소리도 구성지고 노래도 썩 잘 했다. 계속 더 가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산뿐이다. 그래도 가끔 물이 흐르는 곳에는 메마른 풀들이 약간씩 자라고 있다. 특히 오채산이란 곳은 바위 색깔이 검은 색, 붉은 색, 노란 색, 분홍색, 회색 등 말 그대로 오색찬란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말 없는 산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달리자니 머리 속에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수백만 년, 수천만 년 아무 말 없이 서있는 산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랴 싶고, 이런 세상을 만드신 조물주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세상 구경시켜 줬으면 됐지 더 이상 무얼 바라나 싶고, 이런 세상에 나온 우리는 무지무지 행운아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나를 받아주고 그 품 안에 안아준 산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넋을 잃고 바라보며 몇 시간을 달리니 국경 근처 여권 검사하는 곳이 나타났다. 우리는 내려 건물 안에 들어가 검사를 받고 버스는 반대편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막간을 이용해 화장실에 가려고 조그만 구멍가게로 들어가서 아가씨에게 toilet, WC, 세수간 별 소리를 해도 못 알아듣는다. 쉬이~ 했더니 웃으며 뒤로 돌아가라고 가르쳐준다. 건물 뒤로 돌아가니 그냥 노천 화장실이었다. 여기 저기 오물 사이를 지나 볼 일을 보고는 버스로 되돌아왔다.

▲ 허텐의 농촌시장.

다시 출발해 얼마를 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거대한 호수가 나타나고 호수 옆에는 순백의 설산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하나는 무스타그아타이고, 하나는 콩구르란다. 무즈타그는 빙산의 아버지란 뜻이란다. 그리고 카라쿨이란 검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호수의 색깔이 햇볕에 따라 일곱 가지로 변한다고 한다.

주변 경관에 압도된 우리는 밥 먹을 생각도 안 하고 사진을 찍어댔다. 김 사장이 빨리 식사하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모두들 식당으로 들어가 뚝딱 해치우고는 또 나와 설원 위를 걸어다녔다. 대장은 말을 타고 눈부신 설원 위를 달렸고, 우리는 더 늦으면 눈이 녹아 되돌아가지 못 한다고 김창묵씨가 채근해 겨우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도 설산에 정신을 뺏겨 경관을 보기 바빴다. 조수경씨는 조수석에서 더 잘 보인다고 맨 앞의 조수석에 앉아 일어설 줄 몰랐다. 조수경이 조수석에 앉았는데 누가 감히 일어서라 하겠는가?

 

 

 

땅도 검고, 사람도 검고, 집도 검고, 옷도 검고

▲ 허텐의 마리크와티 고성. 흔적만 남아 있다.

10월20일(목) 맑음. 카시에서 허텐으로. 아침에 일어나 떠나기 전에 대장이 카시에는 볼 것이 없냐고 물으니 반초성이 있단다. 반초는 청나라 장군으로 카시성을 공략한 사람인데, 그 승리를 기념해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이른 아침이라 문이 안 열린 관계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냥 허텐으로 출발했다. 허텐까지는 540km로 8시간이 소요된단다. 하도 이동하다 보니 이제 9시간 10시간은 보통이다 싶다.

가도 가도 사막이니 노상방뇨는 기본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주변을 관찰한 다음 자연스럽게 여자들은 오른쪽, 남자들은 왼쪽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해 볼 일을 보았다. 여자 20여 명이 일렬로 쭈그려 앉아 허연 엉덩이를 내놓고 사막에 물을 주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만 명예훼손 죄로 걸릴까봐 간신히 참았다.

얼마 더 가다가 갑자기 전방에 큰 호수 같은 것이 나타났다. 주위에 나무 한 그루도 없어 이상하다 했더니 그게 바로 신기루란다. 또 조금 가다보니 작은 호수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점점 길어지더니 강물처럼 보이다가 사라졌다. 신기루는 빛의 굴절현상 때문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뜨거운 여름날 아스팔트길을 달리다 보면 물이 고인 것처럼 보이다가 가까이 가면 없어지는 것도 작은 신기루 현상이라고 한다.

또 얼마를 달리다가 재래시장이 보여 구경했다. 양고기도 매달아 놓고 목화솜을 잔뜩 실은 당나귀 마차들이 한 곳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목화솜 경매라도 하는 모양이다. 대장은 디카로 사진을 찍어 주민들에게 보여주니 할아버지들의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퍼졌다.

▲ 허텐 시장의 목화 수매장.

얼마를 더 달리니 아만니사한 묘다. 아만니사한이란 여자는 왕비로서 전래음악을 모아 편찬한 사람이란다. 34세에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데, 초상화를 보니 절세미인이다. 미인박명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재수 없으면 90살까지 산다는데, 이 말대로라면 나는 100세도 넘게 살 것 같다.

신강성 사람들을 보면 땅도 검고, 사람도 검고, 집도 검고, 옷도 검고,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실감난다. 인간이란 잠시 뭉쳐졌다 허물어지는 흙이요, 수면에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물방울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저리 가라

▲ 실크로드 전 구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백양나무 가로수.
10월21일(금) 맑음. 허텐. 갈수록 오지로 들어가다 보니 호텔 시설도 갈수록 낙후됐다. 허텐의 호텔은 별이 세 개라고 하는데도 벽에 샤워기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고, 아래로 나오는 수도꼭지도 없다. 요새는 볼 일을 보면 물로 씻어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이 생겨 꼭 씻기는 씻어야겠는데, 샤워기를 틀면 옷이 다 젖을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평소에 암벽타기 하던 실력으로 세면대로 기어 올라 씻고나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잘 닦아놓았다.

볼 일까지 무사히 마치고 호텔을 출발해 마리크와티 고성을 향했다. 고성 가까이 가니 한 떼의 당나귀 마차가 길을 막고 앞서간다. 입구에 도착하니 서로 자기 당나귀를 타라고 난리다. 원래 두 명씩 타는 마차를 한 명씩 타서 거기 있는 마차를 모두 타 주기로 했다.

이 고성은 당나라 때 번성했다가 당나라 말기에 망했다고 한다. 다른 고성처럼 벽들만 조금 남아있다. 흙으로 된 성벽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는 다시 당나귀 마차를 타고 나왔는데, 꼬마 여자 아이가 좇아오며 장갑 달라 머플러 달라 성화여서 장갑만 벗어주고 내렸다. 다른 회원들도 이것저것 다 빼앗겼단다. 한 번 더 탔다가는 껍데기까지 다 벗게 생겼다.

고성에서 나와 이번에는 무화과나무 왕을 보러갔다. 이 무화과나무는 옛날에 한 농부가 예쁜 아가씨와 결혼했으나 수년간 애기가 없어 곤륜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는데, 한 노승이 지팡이를 주며 이것은 서왕모가 준 것이니 가져가라고 하더란다. 그 지팡이를 집에 가져와 땅에 꽂으니 하루만에 뿌리가 내리고 사흘만에 열매가 열려 부인이 이 열매를 먹으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단다.

▲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상에서 가장 긴 포도밭 길.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마당에 가득 차서 도대체 어떤 게 왕나무냐고 물으니 전체가 한 그루란다. 이 무화과나무를 일곱 번 돌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기에 나도 우리 며느리 애기 낳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며 일곱 바퀴를 돌았다. 효험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긴 포도나무 터널을 지나 요타간 유적지를 보러갔다. 말이 유적지지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 목화밭으로 변한 곳에 단지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허텐의 청진사(힌두교 사원)를 보러 갔다. 마침 예배객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와 거리를 가득 메워 안으로 들어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거리에는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로 귀청이 찢어질 지경이다.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저리 가라였다.

청진사까지 다 보고는 민펑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떼를 보니 문득 양은 왜 사나 싶었다. 인간에게 잡아먹히려고 사나. 하다가 그러면 인간은 왜 사나. 죽으려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차라리 안 태어나는 것이 좋을까. 아니다. 그래도 이 세상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 싶었다.

얼마를 더 가니 마침 지평선으로 해가 진다. 떠오르는 해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 같아 희망찬 모습인데, 지는 해는 한 인생의 막이 내리는 것 같아 처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 민펑의 타클라마칸 사막.

이 엄청난 목화가 다 어디로 팔려가는지

10월22일(토) 맑음. 민펑. 아침에 일어나 로비로 내려가 한국으로 엽서를 부칠 수 있나 물으니 영어도 못 알아듣고 김창묵씨가 물어도 못 부친다고 한다. 이 날은 쿠얼러까지 800km를 이동하는 날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차에 올랐다. 새벽별을 보며 출발해 얼마쯤 가니 동쪽 하늘이 밝아온다. 사막에서 일출을 보려고 모래언덕을 뛰어오르니 한잠 잘 잔 듯한 기운찬 해가 지평선 위로 붉은 얼굴을 쏘옥 내민다.

일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다시 버스에 올라 타클라마칸 사막 길을 달린다. 길 양 옆으로 긴 호스가 10여 개씩 늘어서 있고, 호스 옆에는 풀인지 나무인지 메마른 식물이 자라고 있다. 자세히 바라보니 호스에서 물이 조금씩 나와 모래를 적시고 있다. 사막에서 풀 한 포기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갔다.

계속 달리며 사구(沙丘)의 모양을 보니 일률적으로 한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한쪽은 급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이 경사가 완만하다더니 이 지역은 북동풍이 많이 부는 모양이다. 

▲ 허튼의 청진사(힌두교 사원).


얼마를 더 가다가 물탱크가 있는 건물 앞에서 수박을 깨 먹고는 또 모래 언덕으로 올라가 사진들을 찍었다. 한 번 내려놓으면 차에 탈 줄을 몰랐다. 한 번 내릴 때마다 사막에 물들을 주었으니 우리 덕분에 아마 타클라마칸 사막이 조금 축축해지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500km 사막을 횡단하니 드디어 사막 횡단도로의 시점 표지석이 나타나고, 중국석유에서 433km 구간에 호스를 설치해 녹화사업을 했다는 안내판이 나왔다. 거의 서울에서 부산까지 호스를 깔았다는 소리가 되니 참 어마어마하다. 낮에는 사람을 잡을 듯이 뜨겁다가도 해만 떨어지면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드니 참 지구가 자전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을까 싶다. 지구의 반쪽은 타 죽고 반쪽은 얼어 죽었을 것이다.

사막이 끝나자 타림분지가 나타난다. 하얀 솜이 핀 목화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곳곳의 목화 집산지에는 목화가 쌓여 하얀 산을 이루고 있다. 이 엄청난 목화가 다 어디로 팔려 가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는 목화밭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우리나라 면제품도 모두 중국산 목화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목화밭이 끝나고 하얀 눈이 내린 듯 끝없는 벌판이 이어진다. 뜨거운 낮에 눈이 내렸을 리는 없고 그게 모두 염분이란다. 이런 땅에서도 나무가 자라는 게 신기했다. 타림 강을 건너 얼마 더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자 화장실도 갈 겸 낙조도 볼 겸 차에서 내렸다. 마침 주유소 옆 물웅덩이로 양떼가 몰려와 물을 먹는데 그 모습이 또 장관이다. 양떼를 쳐다보며 찍느라 해가 언제 넘어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대장도 갑자기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는지 엄청 기뻐하시며 복 많은 사람들은 다르다고 했다.

▲ 민펑의 타클라마칸 사막. 중국석유회사가 나무를 심어 놓았지만, 과연 효과가 있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으니 대장이 나와 지리산 소설 이야기, 오세암 설화 이야기, 본인의 자서전 등등으로 우리의 무료함을 달래준다. 그래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 어느 덧 쿠얼러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후 김 사장과 김창묵씨가 모두 고생했다며 발 마사지를 시켜주겠다고 한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을 판이라 우리는 모두 한 호텔로 들어갔다. 30명이 넘는 인원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마사지 해주는 아가씨가 모자랐는지 45분 한다는 맛사지가 20분씩 시늉만 내고 말았다. 회원들이 불평하자 김 사장은 김창묵씨에게 반 값만 주라고 하고는 팁으로 2불씩 걷었던 것도 주지 않고 가지고 와버렸다.

쿠얼러는 녹화가 가장 잘 된 곳으로, 길에 휴지 버리면 벌금 50원, 꽁초 버려도 50원이라고 하더니 정말 도시 전체가 깨끗하다.

 

 

 

 

▲ 쿠얼러의 천문관 입구.

순천만 갈대밭 같은 연화호

10월23일(일) 맑음, 쿠얼러. 아침에 로비에 내려가 또 한국으로 엽서를 부칠 수 있는가 물으니 가능하단다. 얼마인가 물으니 5원60전씩이란다. 엽서 석 장을 부치고 버스에 올라 철문관으로 향했다. 철문관은 실크로드 상에서 꼭 지나야하는 문으로, 우리의 문경세재 제1관문 같은 모양이다. 철문관 주위 바위는 철성분이 많아 붉은 색을 띠었고, 철 같이 에워쌌다는 뜻에서도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관문을 구경하다보니 대장은 어느 새 옆 봉우리에 올라 빨리 올라오라고 손짓하신다. 우리도 부지런히 기어 올라가니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산봉우리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대장은 또 마음이 동해서 1시간만 주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여기서 늦어지면 우루무치에서 바자르도 못 보고 발 마사지도 힘들다고 하여 그냥 출발했다.

철문관에서 나와 연화호로 향했다. 연화호는 여름에 연꽃이 많이 핀다는 데, 지금은 가을이라 갈대밭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유람선을 탄다고 하여 지붕 있는 선실에서 유유자적하는 줄 알았더니 모터보트라서 어찌나 추운지 완전 동태가 되는 줄 알았다. 순천만 갈대밭과 비슷했는데 호수 안에 모래섬이 있어 거기 내려 사진을 찍고 놀다가 다시 보트를 타고 나왔다. 대장은 호수 속의 모래섬이 꼭 수호지의 양산박 같다고 감탄했다.

연화호까지 보고는 서둘러 차에 올라 우루무치로 향했다. 가는 길에 황량한 산들만 이어지니 보는 것도 지쳐 비몽사몽간에 가다가 깨어 또 노상방뇨를 하고는 몸을 푼다고 대장이 국민체조를 하자고 했다. 대장 구령에 맞춰 한바탕 체조를 하고는 대장의 태권도 시범까지 감상한 후 다시 차에 올랐다. 우루무치에 도착하니 벌써 오밤중이라 바자르도 다 닫아 몇 안 되는 가게에서 또 스카프를 사들고는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두 팀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호텔로 들어가 발 마사지를 받았는데, 어제 실수를 거울 삼아 오늘은 단단히 시간 약속을 받고는 1시간이 넘게 어깨까지 마사지를 받았다.

▲ 우루무치 인민광장에서 물로 쓰는 서예 감상.

두 팀의 마사지가 다 끝나자 새벽 1시도 넘었다. 지난 번 우루무치에 왔을 때도 호텔에 몇 시간 머물지 못하고 나갔는데, 이 날도 마찬가지라며 오성급 호텔에서 얼마 못 자는 게 아쉽다고 부지런히 방으로 들어갔다.

10월24일(월) 흐린 후 비 몇 방울. 우루무치. 아침에 일어나니 처음으로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비가 오려나 했더니 몇 방울 떨어지고는 말았다. 이렇게 비 오기가 힘드니 온 산에 풀 한 포기 없는 게 당연하다 싶었다.

아침 식사 후 인민광장으로 갔다. 여기저기서 기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광장바닥에 큰 붓으로 무엇을 쓰는 할아버지가 있어 다들 가까이 가보니 허리까지 오는 큰 붓으로 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대롱에는 물이 가득 들어있고 붓 끝은 스펀지로 되어있어 물로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글씨를 어찌나 잘 쓰는지 물이 말라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한 줄은 오른손으로 쓰고 한 줄은 왼손으로 썼는데 양 손 다 너무도 명필이었다. 이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이 광장에 나와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씨 연습도 하고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어찌 보면 선을 쌓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이 모두 감탄하며 탄성을 지르자 할아버지는 더 신이 나서 글씨를 써댔다.

▲ 카시에서 파미르고원을 가로질러 도착한 카라쿨 호수(해발 약 3,700m).


광장에서 나와 카페트 공장을 견학하고 공항으로 향했는데, 열흘 동안이나 같이 지내다 보니 김창묵씨와 정이 들어서 다들 악수를 하며 아쉬워했다. 특히 최영주 선생은 가이드와 포옹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가이드 생활도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 기대와 허탈감이 반복되는 직업이구나 싶었다. 나도 담임할 때 학년 말에 아이들이 졸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가슴이 텅 빈 것 같아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고, 나 자신이 나룻배의 사공이 된 것 같았다. 사공이 강을 건너 주면 손님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갈 길을 가듯이, 학생들은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이다.

우루무치에서 떠나 북경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갈아타고 인천공항에 내리니 서울을 떠난 것이 몇 달 전 일처럼 아득하다. 실크로드 탐방은 어땠었느냐고 묻는다면 가는 게 일이라고 해야겠다. 자고 가고, 먹고 가고, 보고 가고, 사고 가고, 놀고 가고, 누고 가고, 졸고 가고, 그저 가고 또 가고 눈만 뜨면 가는 게 이번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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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현숙 일중산악회 회원 
사진·호영진

출처 : silkroad
글쓴이 : ♧실크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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