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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한글날을 앞두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된 한글 조형물. |
ㅁ은 입술을 붙이고 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입 모양을 본뜨되 한자의 입 구(口)처럼 네모꼴이 되게 했고 세기의 차이를 보이기 위해 금을 더하거나 겹쳐서 ㅂ, ㅃ, ㅍ을 만들었다.
ㅅ은 혀 끝이 윗니나 윗잇몸에 닿아서 나는 소리이기 때문에 이 모양을 본뜬다 하면서 실제로는 한자의 치(齒)에 들어 있는 이 네 개 가운데 하나를 빼내듯이 만들고, 역시 세기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ㅆ, ㅈ, ㅉ, ㅊ을 만들었다. ㅿ은 소리가 ㅅ보다 여린데도 예외적으로 금을 더해서 만든 점이 ㄹ의 경우와 같다.
목구멍을 본뜬 ㅇ은 흔히 소릿값이 없는 글자라고 말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현대음성학을 개척한 이극로(李克魯·1897~1982) 선생이 이 글자의 소릿값을 정확히 판정했다. 그것은 목청 울림 자체이다. 목청 울림은 홀소리와 닿소리 일부에 수반되어 크게 잘 울리도록 하는 목청의 작용이다.
멀리 들리지 않게 하려고 소곤거리는 말은 바로 이 목청 울림을 죽인 것이다. 목청 울림은 이처럼 말소리를 잘 울리게는 하나 독립적인 낱소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낱소리처럼 인식되지 못해서 흔히 무시당하고 마는 것이다. 낱소리는 되지 못하지만 소릿값이 없는 글자는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이 글자가 다른 닿소리 글자 ㅂㆍㅍㆍㄹ 등의 밑에 붙거나(ㅸ, ㆄ, ), ㄱㆍㄷㆍㅂ 등의 앞에 붙으면(ㅇㄱ, ㅇㄷ, ㅇㅂ) 목청 울림이 많아서 한결 부드럽고 가벼운 소리를 적는 데 쓰여 온 것이다. 이 글자보다 소리가 세어서 금을 얹은 것이 ㆆ(된이응)이고 더 세어서 또 금을 곧추세운 것이 ㅎ이다. ㆁ(옛이응)은 소리를 만드는 자리가 여린입천장이라 다르지만 가깝고 소릿값이 아주 비슷해서 혼동될 정도이기 때문에 ㅇ 위에 금을 곧추세워 만든 것이다.
홀소리는 만드는 자리가 닿소리처럼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음성학에서도 닿소리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별하고 설명한다. 세종은 당대 한국어의 홀소리를 세 종류, 곧 밝은 홀소리, 어두운 홀소리, 중간 홀소리로 나누었다.
밝은 홀소리 ㆍ , ㅏ, ㅗ 등은 ‘노랑’ ‘앙큼’ ‘얇아’ 등에서처럼 밝고 작고 얕은 느낌을 주는 낱말에 쓰인다. 어두운 홀소리 ㅡ, ㅓ, ㅜ 등은 ‘누렁’ ‘엉큼’ ‘엷어’ 등에서처럼 어둡고 크고 깊은 느낌을 주는 낱말에 쓰인다. 중간 홀소리 ㅣ는 중립적이라 어떤 홀소리와도 잘 어울린다.
밝은 홀소리는 하늘에 빗대고, 어두운 홀소리는 땅에 빗대고, 중간 홀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사람에 빗대어 하늘과 땅과 사람의 모습을 극한으로 수렴해서 점(ㆍ)과 수평선(ㅡ)과 수직선(ㅣ)으로 기본적인 세 글자를 삼았다. 이들을 일정한 원칙으로 조합해서 ㅗ, ㅏ, ㅜ, ㅓ를 만들고 ㅣ와의 겹소리를 적으려고 ㅛ, ㅑ, ㅠ, ㅕ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홀소리를 적는 모든 낱자나 겹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한국어에 특유한 홀소리 어울림현상을 반영한다. 이 현상은 20세기에 들어와 서양의 언어학자들을 통해 이른바 우랄알타이어족의 언어들이 공유한 것으로 추정되면서 비로소 우리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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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국립극장 앞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행사에서 학생들이 훈미정음 탁본을 뜨고 있다. |
한국어와 비교적 가까운 일본어에도 없고 종류가 아주 다른 중국어에도 전혀 없는 현상이니 15세기의 세종이 한자 운학에 정통한 것만으로는 땅띔(무거운 물건을 들어 땅에서 뜨게 하는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현상이 있는 몽골어나 만주어, 터키어의 글자에 반영되어 참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종이 음성기관을 본떠 닿소리 글자를 만든 것만도 누구나 경탄할 수밖에 없는 착상이거니와 15세기 한국어에서 홀소리 어울림현상을 통찰하고 하늘, 땅, 사람에 빗대며 글자 맨드리에까지 빈 틈 없이 반영한 사실은 참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신비다.
훈민정음은 이처럼 인류 문자의 역사에 견줄 짝이 없을 만큼 위대한 발명품이다. 영국의 언어학자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가 밝혀 주었듯이 문자의 유형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른 ‘소리바탕글자’로서 유일하거니와 소리마디 단위로 모아쓰기를 한다는 점에서는 ‘소리마디글자’와도 같고, 주시경(周時經·1876~ 1914)의 연구와 교육 및 계몽 활동으로 말미암아 1933년 이래 확정된 형태주의 맞춤법의 원리에 따라 형태소나 낱말이 시각적으로 고정된다는 점에서는 ‘뜻글자’ 또는 ‘낱말글자’와도 같다.
결국 문자학적인 위상이 정점에 있으면서도 다른 문자 유형의 특색을 다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글자인 셈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영어 중독증이 심해지는 사회에서 그토록 위대한 임금 세종의 극진한 인간애마저 담긴 이 빛나는 문화재를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지켜 낼 수 있을지 근심스러울 따름이다.
김정수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인문학부 교수·국어국문학